김일성 사망 25주기[횡설수설/정연욱]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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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수령 동지의 심장 고동이 멈췄다.” 1994년 7월 9일 낮 12시. 북한 중대 발표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했다. 김일성 사망 시점은 전날 오전 2시경이었다. 하지만 수령의 ‘영생불사’를 믿었던 북한 주민들은 이 발표가 믿기지 않았다. 당시 북한에 살았던 한 탈북자는 아들이 김일성 사망 소식을 전하자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한다”고 아들을 때렸다고 했다.

▷김일성은 김영삼(YS) 대통령과의 첫 남북 정상회담을 준비하다가 심근경색에 심장 쇼크가 겹쳐 사망했다는 게 공식 발표였다. 김일성은 YS의 평양 방문 후 자신이 서울을 답방할 경우에 대비해 “백두산의 김일성이 왔습니다”로 시작하는 연설 원고까지 써놓았다. 이 자필 원고는 금수산태양궁전에 공개 전시되기도 했다.

▷김일성 사후 북한 경제는 곤두박질쳤다. 실패한 3차 7개년 계획을 대체할 새 계획은 엄두도 못 냈고 200만∼300만 명이 굶어 죽는 ‘고난의 행군’이 닥쳤다. 북한은 100년 만의 장마 등 자연재해가 원인이라고 주장하지만 김씨 왕조 체제의 한계 때문이라고 보는 분석이 많다. 그래서 지금도 북한에선 “김일성 때는 그나마 먹고살았다”는 소리가 나온다.

▷북한은 25년간 경제는 계속 최빈국 신세지만 핵개발 차원에선 비약적 변화를 겪었다. 김정일은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는 말을 자주 했지만 사실 김일성은 1960년대 말부터 핵개발에 착수해 1994년엔 이미 영변 핵반응로에서 10∼12kg의 플루토늄을 추출한 것으로 국제사회는 평가한다. 김일성이 뿌린 씨앗이 지금의 수십 개 핵무기로 자랐다.

▷김정일은 김일성 사후 첫 3년간 유훈통치에 의존해 권력 기반을 다졌다. 손자 김정은도 김일성 흉내 내기를 자주 한다. 작년 8월 김정은이 반팔 속옷 차림으로 현지 시찰을 하는 모습이 보도됐다. 김일성도 속옷 차림 현지 지도 모습을 자주 노출시켰었다. 김정은이 손바닥을 엇갈리게 해서 박수를 치거나, 옆머리를 짧게 친 모습 등도 김일성 향수를 자극한다. 소련의 위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장악해 6·25를 일으킨 전쟁범죄 책임자지만 워낙 우상화 작업에 열을 올린 결과 여전히 김일성 후광이 먹혀드는 것이다.

▷김정은이 김일성 사망 중앙추모대회에 참석한 것은 2014년 20주기 행사 때뿐이다. 정주년(0이나 5로 꺾어지는 해)에는 행사 규모가 커지는 만큼 이번 25주기엔 김정은이 참석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하노이 회담 실패로 체면을 구긴 김정은으로선 조부의 아우라가 절실할 것이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김일성 사망 25주기#북한 경제#김정일#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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