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청와대에서 인사검증 업무를 했던 한 인사는 국무총리, 장차관, 공공기관장 등에 대한 인사검증을 하면서 늘 이 같은 궁금증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인사검증 대상자로 가장 많이 내려오는 직군은 판검사 출신 등 법조인. 두 번째는 군인, 세 번째는 공무원. 여의도 정치권 인사들은 4순위에 불과했다.
어느 날 박 전 대통령에게 질문할 기회를 잡은 그는 조심스럽게 “법조인들을 왜 이렇게 좋아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박 전 대통령은 웃으며 “안정감이 있잖아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안정감’은 박 전 대통령의 인사철학을 집약한 핵심 키워드다. 국무총리 인사만 봐도 일부가 낙마하는 홍역을 치르면서도 김용준, 정홍원, 안대희에 이어 마지막엔 황교안 현 자유한국당 대표까지 정권 내내 법조인들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알려지지 않았던 후보자들도 송종의 전 법제처장,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 등 대부분이 법조인이었다. 하지만 안정감을 갖춘 ‘박근혜의 율사’들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등의 순간엔 별 역할을 하지 못했고, 정권은 그렇게 스러져 갔다.
박 전 대통령의 마지막 총리였던 황 대표도 안정감을 자신의 핵심 브랜드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박 전 대통령을 닮은 면이 있다. 물론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 갈 곳을 잃고 표류하던 한국당이 가장 절실했던 것도 어찌 보면 ‘황교안식 안정감’일지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2월 27일 당 대표로 취임한 황 대표의 선택도 안정감을 빼놓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취임 직후 당직 인선에서 통상 3선 국회의원이 배치되던 당 사무총장에 선수(選數)를 높여 4선의 한선교 의원을 낙점한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4·3 보궐선거 경남 통영-고성 지역구에는 예상대로 검사 시절 황 대표의 측근인 정점식 전 대검 공안부장이 발탁됐고, 황 대표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어 여의도에 입성했다. 경남 창원성산엔 황 대표 출마론이 나왔지만 황 대표는 모험 대신 단독으로 공천을 신청한 강기윤 전 의원을 공천했다. 통영-고성에서 1승, 창원에서 석패한 선거 결과를 두고 당 안팎에선 “안정적인 당 운영의 결과로 사실상 승리한 선거”라는 평가가 나왔다.
내년 총선 공천관리에 관여할 가능성이 높은 당 조직부총장에 40대 변호사 원영섭 서울 관악갑 당협위원장을 ‘깜짝’ 임명한 것을 두고도 안정감을 인선 배경으로 꼽는 분석이 나온다. 원 부총장이 지난해 ‘드루킹 특검’을 이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하는 등 오랫동안 당에 기여하면서도 친박(친박근혜), 비박(비박근혜) 같은 계파색이 뚜렷하지 않다는 점에서 황 대표가 상식선에서 선택할 수 있는 ‘안정적’ 인사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벌써부터 당 일각에선 “정점식 의원 공천에 이어 또 법조인이냐” “또 박근혜식 안전 제일주의냐”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 재선 의원은 “정점식 의원이나 원 부총장의 능력과 자질이 떨어진다는 게 아니다. 신임 당 대표의 정치적 액션치곤 너무나 안정적이라는 게 문제”라고 했다. 실제로 황 대표 체제 한 달 반 동안 ‘탕평’ ‘세대교체’ ‘파격’ 등 누가 봐도 눈길을 끌 만한 강력한 대국민 메시지가 담긴 ‘황교안표 정치’는 별로 없었다.
물론 황 대표가 당초 예상보단 순항하고 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특히 대여 투쟁 메시지가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날카로워지면서 “정치 신인에서 벗어났다”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정치인 황교안에 대한 본격적인 평가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꼭 1년 남은 내년 총선은 물론이고 차기 대선까지의 길은 황 대표가 법무부 장관과 총리를 지내며 경험하기 어려웠던 각종 비포장도로와 ‘지뢰밭’이 기다리고 있다. ‘안정적 드리블’만으론 돌파해 완주하기 어려운 길이며 중도층으로의 외연 확장도 어렵다. 결국 필요한 건 황 대표만의 ‘플러스알파’다. 그게 뭔지는 아직 황 대표 자신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걸 찾아서 국민들에게 보여주지 못한 채 안정감만으로 승부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황 대표가 과연 박 전 대통령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황교안 2.0’으로 거듭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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