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의 생각돋보기]지금은 다이어그램의 시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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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2016년 회계연도 예산안 그래픽. 백악관 홈페이지
미국의 2016년 회계연도 예산안 그래픽. 백악관 홈페이지
“유학자도 아닌, 변방의 일개 무장이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읽고 있어요. 이성계가 역심을 품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작년에 인기를 모았던 TV 사극 ‘정도전’에서 고려 말의 권신(權臣) 이인임이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해 내세운 명분이다. 개국공신 조준도 이성계에게 “이 책을 읽으면 가히 나라를 만들 수 있습니다(讀此, 可以爲國)”라고 말한다. 책 한 권만 읽으면 역성(易姓)혁명도 가능해지고, 국가 경영도 쉽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과거의 기록은 이처럼 권력의 지배 원리를 가르쳐 주는 거의 절대적인 수단이었다. “전하, 아니 되옵니다!”라고 왕에게 간언하는 신하들의 논리적 근거가 모두 고전 속에 있었고, 일반 백성에게 부과되는 예의범절의 기원도 모두 과거의 책 속에 있었다. 서양에서도 프랑스대혁명 이전까지 역사학자들은 왕의 계보학을 썼고, 모든 지식은 도서관이라는 건축물 속에 엄격한 도식에 따라 가시적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모든 권력이 과거의 기록인 책에서 나왔고, 책들은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었으므로 왕조 시대의 권력은 도서관에서, 다시 말해 기록 보관소인 아카이브(archive)에서 나왔다.

그러나 18, 19세기에 이르면서 어느 때부터인가 한 사회를 움직이는 힘의 원리가 더는 기록 보관소에 있지 않게 되었다. 미세한 동작들을 세밀한 그림으로 보여 주는 총검술이 군대를 효과적으로 통솔할 수 있게 해 주었고, 펜 잡은 손가락이 알파벳의 선을 긋는 모습을 초 단위로 보여 주는 일러스트 글씨 교본은 교사로 하여금 힘들이지 않고 학생들을 통제할 수 있게 해 주었으며, 일렬로 나란히 배치된 교실에 창문을 크게 낸 건축 설계도는 복도 한 번 걷는 것으로 학교 전체의 수업 상황을 한눈에 파악하게 해 주었다. 이것이 바로 푸코가 판옵티콘이라고 이름 붙인 근대적 권력의 방식이다. 이제 권력은 아카이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건물 내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건축 설계도나, 인간의 몸동작을 미세하게 묘사해 놓은 개념도, 또는 병영의 막사 배치도나 시간표, 혹은 통계 숫자를 일목요연하게 확인할 수 있는 도표에서 나오게 되었다. 이 도표, 설계도, 개념도, 그래프 등을 한마디로 아우르는 말이 다이어그램이다. 근대(近代)는 권력의 원천이 아카이브에서 다이어그램으로 이동했을 때 시작되었다. 이때 다이어그램은 단순한 도표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지배 원리의 은유다.

직장인들의 거센 반발에 놀라 허둥지둥 소급 적용을 결정하고 건강보험료 개편안도 잠정 취소한 우리 정부는 해당 정책의 취지나 철학을 언제 국민에게 제대로 설명한 적이 있었던가?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야심 차게 추진하는 프랑스의 ‘책임, 연대 협약’의 홍보 일러스트들은 재미없는 숫자와 딱딱한 경제 정책을 동화처럼 예쁜 개념도로 간단하고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미국의 2016 회계연도 예산안의 그래픽은 빨강, 자주, 초록, 노랑의 알록달록한 사각형들이 마치 새콤달콤한 사탕 같고, 사각형을 클릭하면 해당 부서로 들어갈 수 있어서 디지털식이기까지 하다. 그래픽이나 일러스트는 결국 정부가 얼마나 국민에게 다가가 설득하려고 노력하는가를 보여 주는 상징물이다. 어려운 용어의 정책들을 관보나 법령집에 올려놓기만 하면 국민이 그대로 따르던 시대는 갔다. 세상은 다이어그램식으로 변했는데 우리 정치인들은 아직도 아카이브식 사고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박정자 상명대 석좌교수
#다이어그램#회계연도 예산안#건강보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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