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시인 “내게 영향 준 작가? 나는 영향을 거부해, 내 조상은 나”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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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갈 때 보았네/올라올 때 못 본/그 꽃’

인생에 대한 성찰을 3줄로 압축한 시 ‘그 꽃’부터 우리 역사에 명멸했던 인물들을 다룬 30권짜리 ‘만인보’까지, 빛 고운 서정시부터 날선 현실 비판을 담은 저항시까지. 고은 시인의 시 세계는 깊고 넓다. 소설과 평론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든 것은 물론이고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로 시작하는 ‘가을 편지’, 가수 양희은이 부른 ‘세노야’ 등 7080세대와 친숙한 노랫말도 썼다.

영향을 준 작가들이 있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나는 영향을 거부한다. 우리 모두는 바람 물 달빛 이슬의 영향을 받는다. 그런 것의 일부처럼 받은 영향이라면 인정하지만, 내 조상은 나다!”

창작 활동이 그랬듯이 삶 역시 사회적인 틀에 갇히기를 거부했다. 젊은 시절 ‘일초’란 법명으로 10년 동안 승려 생활을 했고, 민주화 투사였고, 술에 얽힌 기행으로도 유명했다. 그러나 1983년 14세 연하의 영문학자 이상화 씨와 결혼하면서 시인의 무절제한 일상은 막을 내린다. 사랑하는 연인, 영감을 주는 존재, 든든한 동지로서 늘 그의 곁을 지키는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뷰 시작 전에 부인 이 씨가 차와 과일을 내왔다. “두 분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자”는 말을 건넸더니 손사래를 치고 황급히 모습을 감추었다. 대화 도중에 어쩌다 부인 얘기가 나오면 시인의 표정이 알전구를 켠 듯 환해졌다. “아내의 말, 미치도록 잘 듣는다. 아내 없이는 문학세계도, 내 존재도 불가능하다. 그렇게 술을 먹고도 살아 있는 것은 아내 덕분이다. 옛날처럼 살았다면 벌써 땅속에 있을 것이다. 결혼 이후 내 문학도 질과 양 측면에서 달라졌다.”

그는 아내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땅속에 박힌 바위와 같다”고 비유했다. 시인의 열렬한 사랑은 2년 전 나온 ‘상화 시집-행성의 사랑’에도 실려 있다. 한 편 한 편 읽다 보면 이 부부가 함께 보낸 30년의 세월이야말로 놀라운 예술적 경지임을 알게 된다. 시인과 헤어질 때 문득 노자가 한 말이 생각났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힘이 생긴다. 그리고 깊이 사랑받으면 용기가 생긴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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