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주성하]김정은의 ‘용감한’ 염소 방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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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1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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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국제부 기자
주성하 국제부 기자
“히야, 분대장 동지, 저… 저길 보십시오. 산에 염소들이 있습니다.”

이동 중 잠시 멈춰선 북한군 차량 행렬에서 한 병사가 벌떡 일어나 감격스럽게 소리쳤다. 그러자 다른 병사들도 환호했다.

“와, 진짜네. 여긴 아직 염소가 있구나…. 천국에 왔다야….”

주변에 있던 민간인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얘들은 염소 처음 보나.”

1990년대 중반 경제난이 닥치기 직전 북한의 내 고향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다. 그 병사들은 주둔지 변경을 명령받고 강원도에서 막 도착했던 참이다.

병사들이 왜 염소를 보고 놀랐는지는 1년도 안 돼 드러났다. 마을의 염소는 물론 닭 돼지 토끼 등 가축의 씨가 말라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용감한 ‘공산군’은 주인이 못 나오게 문에 자물쇠까지 걸고 훔쳐 갔다. 도둑질로 처벌받은 군인은 없었다. 몇 년 뒤 군인들이 ‘선군(先軍)시대’가 왔다고 기고만장해 돌아다닐 즈음 우리 마을도 집안에서 키우지 않는 가축은 내 것이 아닌 시대가 됐다.

그 뒤부터 나도 다른 지방에 갔다 산에서 염소를 발견하면 “히야, 여긴 아직 염소가 있네” 하고 감탄하게 됐다.

1998년인가 김정일의 지시가 떨어졌다.

“산에 토끼와 염소 떼가 흐르게 해 인민들이 고기와 우유를 맘껏 먹게 하시오.”

이 지시를 집행한다면서 북한은 아사자가 속출하는 마당에 스위스에서 토끼 종자는 물론 풀씨까지 수입하기도 했다.

하나 설사 하느님의 지시라 한들, 군복 입은 도둑 떼가 흐르는 산에 염소 떼까지 흐르게 하는 방법은 도저히 없었다. 그렇다고 지시를 거역할 수도 없고…. 하지만 위에 정책이 있으면 아래에는 대책이 있는 법이다. 농장은 염소 새끼를 몇십 마리 사다 놓았고 얼마 뒤 방목공이 우리에서 함께 잠을 잤음에도 불구하고 예상대로 군인들이 다 훔쳐갔다. 지시를 지킨 것도 아니고 지키지 않은 것도 아닌 걸로 끝난 셈이다.

다음 해 새로운 지시가 떨어졌다.

“양어장을 대대적으로 건설해 인민들이 민물고기를 많이 먹게 하시오.”

숱한 돌격대가 만들어져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전국 도처에 수영장만 한 구덩이를 수없이 파 놓았다. 하지만 전기와 사료가 없는데 양어가 되나. 다 아는 사실을 김정일만 모르는 듯했다. 그렇다고 목을 걸고 말하는 사람도 없고. 결국 이 지시도 수많은 물웅덩이를 전국에 남긴 채 끝났다. 파지 않았으면 옥수수라도 심어 먹지.

사람들이 “장군님, 우리가 언제 민물고기를 먹겠다고 했습니까”라고 수군댔다. 그로부터 얼마 뒤엔 지방 사람은 구경도 하기 힘든 전기로 난방을 하는 타조 농장도 새로 건설됐다.

고려 시절 문인 이규보가 북한에 환생해도 똑같이 썼을 것 같다.

“사람이 사노라면 우스운 일 하도 많아/낮에는 바빠서 다 웃지 못하고/밤중에 이불 속에서 혼자 웃노라/손뼉을 치며 소리 내어 웃노라.”

이달 24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선 대규모 축산기지를 만들기 위해 떠나는 수천 명의 평양시 돌격대원들을 바래는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강원도 세포, 평강, 이천에 수만 정보의 인공 풀판과 자연 풀판을 만들어 가축을 기르겠다고 한다. 하필 이 겨울에 삽 메고 강원도로 떠나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하게 보이는 건 둘째 문제다.

그 지역은 돌을 열 개 던지면 아홉 개가 군인 머리에 떨어진다고 할 정도로 여러 개의 사단이 몰려 있는 곳이다. 반면 공급은 가장 안 좋아서 군관들조차 먹을 것만 보면 눈이 뒤집히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김정은이 지금 고깃덩어리들을 키우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걸 보며 북한 주민들은 이불 속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까. 웃고 있을까, 울고 있을까.

주성하 국제부 기자 zsh75@donga.com
#염소 방목#김정은#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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