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끝별]새들이 ‘새획’을 그으며 나는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6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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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끝별 시인·명지대 교수
정끝별 시인·명지대 교수
일진(一陣)의 집결 장소는 광화문 광장이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전 관람이 목적이었다. 카르티에브레송이 포착한 ‘결정적 순간’들에는 군더더기와 설명이 없었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절제된 침묵 속에 숨겨져 있었다. 천 개의 얼굴을 가진 빛의 음역이 선사하는 흑백사진의 깊이일 것이다. 우연한 한 컷의 셔터가 저리 운명적인 영원을 꿰뚫고 있다니! 감각과 상상을 한껏 열어젖혔던 우리의 감상과 수다는 유쾌했고 충만했고 즐거웠다. “사진작가들에게 있어 한번 가버린 것은 영원히 가버린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 작업의 고충과 위력이 비롯된다. 우리의 작업은 현실을 감지해 거의 동시에 그것을 카메라라는 우리의 스케치북에 담는 일이다.” 이렇게 말했던 카르티에브레송의 한 컷 한 컷은 그 자체로 시였고 사랑이었고 삶이었다.

이진(二陣)과의 합류를 위해 식당으로 이동하는 길, 충무로 대한극장에서는 아직도 ‘건축학개론’을 상영하고 있었다. 수다는 자연스럽게 영화로 넘어갔고 식당에 도착해서도 계속됐다. 겉절이를 집다 말고 40대 남자 후배는 가슴을 부여잡고 말했다. “너무 좋아요. 그 영화엔 사랑도 뭐도 없어요. 찌질하고 찌질했던 내 스무 살의 흔적들, 그 자체예요.” 그러자 50대 남자 선배가 씹던 삼합을 얼른 삼키고는 말했다. “‘클래식’ 봤어? 그걸 먼저 봐야 해!” 아쉽게도 두 편을 다 본 사람은 그 자리에 없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두 편 다 못 본 사람이었다!

‘새가슴’지녔기에 가뿐하게 훨훨


‘건축학개론’파는 얘기했다. 순댓국집 외아들 이제훈이 입은 셔츠가 GEUSS였어. 그 많던 NICE, PRO-SPORTS, ADIDOS들은 다 어디로 갔냐?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 그때 그 시절의 삐삐, CD플레이어, 이어폰 같이 듣기, 무스와 올백. 그리고 정릉 자취방, 신촌·수색·능곡·일산의 기차역들, “첫사랑이 다 잘되면 그게 첫사랑이야? 끝사랑이지”라며 우리 곁을 지켜주었던 숱한 ‘납뜩이’들…. 쿨한 척하면서도 한없이 신파적이었던 망설임과 떨림에 파묻혀 버렸던 첫사랑의 고백, 그게 나라니까요! 영화를 보면서 내 첫사랑이 아니라 나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을까가 궁금했어요, 이건 참한 여자 후배의 말이었다.

‘클래식’파의 맞짱은 이러했다. “우연히, 우연히, 우연히… 그러나… 반드시”가 포스터 광고 문구였는데 멜로의 정석이 ‘세 번의 우연은 필연’이라는 거 알지? 작업의 정석은 ‘우연을 세 번 만들라, 필연으로!’였어. 장님이 된 조승우가 손예진과 재회하는 장면이 압권이었어요. 그렇지! 조승우가 이렇게 대사 치지. “거의 완벽했는데, 어젯밤에 와서 연습했었거든,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아름답게 보내주기 위해 자신의 비극을 숨기는 배려, 이게 또 멜로의 정수야, 정수! 정수는 날 짝사랑했던 남자애 이름이었는데, 윗옷을 함께 쓰고 빗속을 달리는 거, 우리도 많이 해봤잖아요? 또 있어, 비틀스! 사교댄스 교습장을 순식간에 고고장으로 만들어버린 ‘히피 히피 셰이크(Hippy Hippy Shake)’는 한 시대의 정신을 담고 있어, 조승우를 장님으로 만든 월남 참전 문제와 맞물려 있지.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 그리고 다른 몸으로 환생하는 사랑도 멜로의 로망이죠. 엄마 첫사랑의 연애편지를 보며 이렇게 말하잖아요. “에이, 유치해. 아니야, 클래식하다고 해주지.” 그러고는 연애편지 주인의 아들과 다시 첫사랑에 빠지잖아요, 똑같이!

실패한 첫사랑을 영원한 사랑의 아이콘으로 만든 이는 단테였다. 아홉 살의 단테는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덟 살의 베아트리체를 본 순간 자신의 ‘비애티튜드’(beatitude·더할 나위 없는 행복)임을 직감했다. 열여덟 살의 단테가 지나가는 열일곱 살의 베아트리체를 거리에서 스치듯 본 게 두 번째 만남이었다. 단 하나의 여자와 단 두 번의 스치듯 우연한 만남, 첫눈에 반했으나 소유할 수 없었던 첫사랑, 젊음의 절정에서 요절했기에 영원히 떠나버린 그 끝사랑을 단테는 ‘신곡(神曲)’ 안에 불멸의 사랑으로 담아냈다. 단테를 천국으로 인도한 전령사가 바로 그녀, 베아트리체였다.

네버엔딩의 첫사랑만으로도 우리는 내내 새들처럼 즐거웠다. 폭력, 자살, 등록금, 취업, 파업, 해고, 유로존 위기, 부채, 종북, 탈북, 애국가, 대통령 사저, 민간인 사찰, 대선 후보, 인육 따위는 한마디도 안 나왔다. 그날 우리는 이미 많이 지쳐 있었던가 보다.

난폭하고 무도한 현실 잊고싶어


새들이 가볍게 나는 이유는 머리가 ‘새대가리’고, 가슴이 ‘새가슴’이라서가 아닐까? 그래서 매번 새들은 텅 빈 허공을 ‘새획’을 그리며 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도 그날만은, 각자의 베아트리체가 우리 모두를 천국으로 인도해주기를 꿈꾸며 새처럼 날아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생의 ‘결정적 순간’들을 가슴속 뷰파인더로 담아내고, ‘클래식’한 것들에 충실한 ‘사랑학개론’을 다시 들으며, 잠시, 잠시만이라도, 이 난폭하고 무도한 현실들을 잊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6월의 크리스마스처럼!

정끝별 시인·명지대 교수
#동아광장#정끝별#건축학개론#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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