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꿔간 쌀 당연한 듯 떼먹는 北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6월 9일 03시 00분


북한 사회에서 ‘3대 바보’라는 말이 유행한다. 첫째 바보는 돈을 빌려 주는 사람, 둘째 바보는 돈을 빌리지 못하는 사람, 셋째 바보는 빌린 돈을 갚는 사람이다. 북한 당국이 우리 쪽에서 꿔간 식량 차관을 갚을 때가 됐는데도 입을 닫고 있는 것을 보면 빌린 돈을 갚을 의사가 아예 없는 모양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0∼2007년 우리는 북한 측에 7억2000만 달러어치의 식량 차관을 제공했다. 2000년 제공한 쌀 30만 t과 옥수수 20만 t에 해당하는 차관액 8836만 달러 중 첫 상환분 583만 달러를 갚아야 할 날짜가 7일이었다. 우리 정부의 차관 대행기관인 한국수출입은행이 북측 대행기관인 조선무역은행에 팩스를 보내 상환 금액과 기일을 통보했는데도 아직까지 묵묵부답이다.

우리가 북측에 제공한 차관에는 식량 외에 남북 철도 및 도로 연결 사업을 위한 자재와 장비, 섬유 신발 비누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 경수로 건설사업을 위한 대출금도 있다. 원금만 2조4582억 원어치이고 이자까지 포함하면 약 3조5000억 원에 이른다. 남북관계와 북의 경제 사정을 감안해 상환 시기와 이자의 조건을 북측에 유리하게 했다. 그런데도 북이 첫 상환액부터 나 몰라라 하는 것을 보면 3조5000억 원을 다 떼어먹을 심산인 모양이다. 처음부터 갚을 의사가 없었으면 차관을 마다하고 무상원조로 달라고 요청했어야 옳다.

차관을 제공할 때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여러 가지 안전장치를 갖추는 것이 상거래의 기본이다. 그러나 대북(對北) 차관은 안전장치가 부실했다. 사실상 당국 대 당국 간의 거래인데도 대행기관 간의 약정으로 처리했고 북한 당국의 지급보증이 명시되지 않았다. 법적 분쟁이 발생해도 당국 간 문제가 아니라 대행기관 간 문제로 귀착되기 쉽다. 대북 차관에 대한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인식이 얼마나 안이했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북한은 지금 당장 갚을 능력이 안 되면 언제 어떻게 갚을 것인지 구체적 상환 계획을 밝히기 바란다. 정 형편이 어렵다면 그리스처럼 부채의 일부 탕감이나 상환 연기를 정중히 요청해야 할 것이 아닌가. 김정은이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주려면 무엇보다 대외 관계에서부터 신뢰를 쌓아야 한다. 남의 돈을 꿔가고 갚지 않는 나라라는 낙인이 찍히면 앞으로 국제사회에서 차관 얻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사설#북한#대북관계#북한 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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