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전에 이것만은…/김동연]두 아들과 ‘남자 대 남자’로서 인생을 論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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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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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셋에 돌아가신 아버님
25년 만에 산소 이장하며 응어리진 원망-그리움 털어놔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항상 꿈을 꾸었다. 그중에서도 절실한 꿈이 하나 있었다.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버킷리스트 가장 앞자리에 있는 꿈이었다. 바로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대화’였다.

아버지는 서른셋 젊은 나이에 한 살 어린 아내와 네 자식을 두고 돌아가셨다. 나는 장남으로 열한 살이었다. 살던 큰 집에서 쫓기듯 청계천 무허가 판잣집으로 이사했다. 그 집은 몇 년 뒤 철거돼 우리 가족은 옛 성남시로 강제 이주하게 됐고 한동안 천막에서 살아야 했다. 망해도 그렇게 망할 수가 없었다. 나는 상업고교에 진학했고 졸업도 하기 전에 은행에 취직했다. 할머니와 어머니, 세 동생을 부양하는 가장이 된 것이다.

일찍 철이 들면서 갖게 된 가슴에 사무친 꿈 하나는 바로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대화였다. 단 하루, 아버지와 철든 남자 대 남자로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수명을 일 년쯤 단축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만약 아버지와 대화할 수 있다면 처음에는 아버지를 원망하리라 생각했다. 뭐가 급해서 젊은 아내와 네 자식을 두고 그리 빨리 가셨냐고. 장남인 제 좁은 어깨에 너무 많은 짐을 얹어서 힘들다고.

한참 뒤에는 도대체 아버지가 어떤 분이었냐고 묻고 싶었다. 공부가 짧았지만 젊어서 사업을 일으켰던 분. 남 돕기를 좋아했던 분. 일등을 하지 못하면 어김없이 매를 들던 분. 그런 그분이 어느 몹시 추운 날 등굣길 내게 “춥지? 춥지 않게 해줄게”하며 불러줬던 ‘꽃집의 아가씨는 예뻐요,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라는 노래. 돌아가신 뒤 발견한 일기장에서 본 젊은 아버지의 고민들. 그분을 만나면 묻고 싶었다. 도대체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냐고. 어떤 꿈을 가지고 계셨냐고.

나중에는 자랑하고 싶은 일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어린 나이에 직장생활하며 가족 돌보고 야간 대학에도 진학했다고. 힘들게 공부해 고시에 합격했다고. 경제기획원을 시작으로 자리보다는 ‘사회 변화에 대한 기여’를 신조로 공직생활을 하고 있다고. 장학금을 두 개나 받아 미국에서 박사까지 했다고. 아버지가 그렇게 하고 싶어 하셨던, 본관이 잘못 기재된 호적도 정정했다고. 동생 셋 다 결혼시켰고 늙어가는 어머니 잘 모시려고 애쓰고 있다고.

더 뒤에는 다른 이야기, 인생과 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사는 이야기와 죽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하고 싶었다. 어느 사진을 봐도 이제는 나보다 20년 이상 젊은 청년 아버지와 인생을 관조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돌아가시고 25년 되던 해 산소를 이장하게 됐다. 여러 날 고된 작업이었다. 봉분을 허물고는 일꾼을 물리치고 직접 맨손으로 땅을 파 유골을 수습했다. 당일 새 산소로 모시기에는 시간이 부족해 다음 날 입관하기로 했다.

그날 유골을 차 조수석에 모시고 아버지가 총각 때부터 사셨던 동네를 일부러 돌았다. 천천히 차를 몰면서 옆자리에 대고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 이제 사셨던 집 쪽으로 갑니다. 25년 만이시지요. 그동안 많이 변했습니다.” 나는 갑자기 어떤 생각에 눈물을 왈칵 쏟았다.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간절히 가졌던 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꿈. 내 수명이 일 년 단축되더라도 단 하루 아버지와 대화했으면 했던 꿈. 그 꿈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아버지는 25년 만에 햇빛을 보셨고 나는 아버지와 만 하루를 지낼 수 있었다. 그 시간 내내 소리 죽여 눈물 흘리며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드렸다.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오랫동안 가졌던 ‘아버지와의 대화’의 꿈을 이제는 거꾸로 가져 본다. 두 아들의 아버지로서 자식들과 철든 남자 대 남자로서 대화하고 싶다는 소망을 버킷리스트 맨 윗줄에 올린다. 나는 누구였고 무슨 꿈을 가지고 있었는지 이야기하고 싶다. 또 두 아들은 무슨 꿈을 가지고 있는지 듣고 싶다. 인생과 사랑 그리고 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아버지와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두 아들과 나누고 싶다. 그리고 아버지와는 하지 못했던 포옹을 이야기 끝자락마다 나누고 싶다. 아, 돌아가신 아버지도 왠지 그 대화의 장 어디엔가 계실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김동연 기획재정부 2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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