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윤창현]긍정의 힘, 부정의 힘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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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현 객원논설위원·서울시립대 경영학부교수
윤창현 객원논설위원·서울시립대 경영학부교수
“이 약 드시면 두통도 줄고 상태도 호전될 겁니다”라며 의사가 건네는 하얀 가루약. 얼마 후 다시 병원을 찾은 환자는 상태가 호전됐다며 “선생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한다. 그런데 이 가루약은 실제로는 밀가루였다. 이것이 소위 ‘플라시보 효과’다. 약이 필요 없는데도 환자가 기어이 약을 복용하고 싶어 한다면 심리적 안정을 위해 밀가루를 환자에게 제공하는 것 자체가 처방이 될 수 있다. ‘좋은 약을 먹었으니 잘되겠지’라는 ‘긍정의 힘’이 잘 작동하면 예상치 않게 좋은 효과가 나올 수도 있다.

음모론이 正論 대접받는 사회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의사가 좋은 처방전을 주는데 그 의사를 싫어하는 간호사나 동료 의사가 환자에게 귓속말로 “그 처방전 엉터리입니다”라고 속삭인다면 어떨까. 물론 환자가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왠지 꺼림칙한 상황에서 약을 복용한다면 두통은 더 심해질 수도 있다. 이것이 소위 ‘노시보 효과’다. ‘노시보 효과’는 ‘부정의 힘’을 보여준다. ‘이 처방전 엉터리 아닐까’라는 의심과 함께 부정적 정서를 가지고 약을 복용하면 스트레스성 호르몬이 분비되면서 약효는 반감될 뿐 아니라 아예 효과가 없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 우리 사회는 부정의 힘, 분노의 힘, 그리고 이와 연결된 ‘노시보 효과’가 전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부가 하는 일은 모두 우습고 ‘가카’의 말은 모두 거짓이다. 46인의 용사가 희생을 당한 천안함 폭침사태는 자작극 수준으로 매도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나라를 망치는 음모라는 비방이 나돈다. 무슨 얘기를 해도 음모론이 휘감고 다닌다. 이러다 보니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의견은 무시 또는 질타를 당하고 비판과 음모론이 오히려 정론(正論)으로 취급된다. ‘나꼼수’식의 속삭임은 어느덧 많은 사람의 뇌리를 사로잡고 무슨 말을 하건 무슨 얘기를 하건 불신하는 정서가 자리를 잡아 버렸다.

물론 당연히 이유가 있다. 글로벌 위기가 덮치고 양극화가 심화하고 물가는 오르고 살림은 팍팍해진 데다가 교육, 주거, 노후, 의료 문제까지 겹쳤다. 게다가 소위 기성세대 내지 기득권층에 대한 불신도 심하고 ‘금융위기조차 예언 못한 것들’ 운운하며 주류 경제학도 매도당하면서 자본주의를 질타하는 목소리까지 높아졌다. 이처럼 병이 깊은데 여기에 ‘노시보 효과’까지 겹쳐지다 보니 무슨 처방전을 내밀어도 효과는 시원찮다. 의사들은 다 돌팔이, 엉터리가 되고 있는 파괴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 어려운 틈을 비집고 들어와 ‘지금과 반대로만 하면 다 잘될 거야’라는 식의 위험한 처방전까지 난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분노의 선택, 후회 부른다

그러나 우리를 괴롭히는 이번 질병이 컴퓨터 바이러스가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새로이 등장한 극악한 난치성 병원 바이러스로부터 도래된 사실을 감안하면 그 어떤 처방전도 그리 쉽게 병을 고치기는 힘든 상황이다. 글로벌 경제 전체가 심한 독감을 앓고 있고 특히 그동안 잘나가던 주요 7개국(G7) 선진 국가들이 나가떨어지고 있다. 바이러스가 끊임없이 외부에서 유입되다 보니 병 고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나마 우리가 상대적으로 잘 견디고 있다고 하면 주치의만 욕할 게 아니라 상황의 어려움도 일부 인정하고 힘을 모으면서 때로는 긍정적 접근을 하는 것이 병의 극복에 매우 절실할 수 있는 것이다.

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라는 단어를 만들어 주목을 받은 골드만삭스 자산운용의 짐 오닐 회장은 최근 BRIC 다음으로 세계를 이끌어갈 성장동력 4개국으로 MIKT(멕시코 인도네시아 한국 터키)를 지적한 바 있다. 이처럼 전 세계가 우리를 주목하고 있고 한류와 케이팝(K-pop)이 세계인을 사로잡고 있으며 무역 1조 달러도 세계 아홉 번째로 달성해 냈다. 무역 1조 달러가 나랑 무슨 상관이냐는 사람도 있지만 거꾸로 수출이 안 되고 무역적자가 났더라면 우리 경제는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심각한 위기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을 것이다.

부정의 힘은 강하다. 전염력도 상당하다. 분노의 힘은 더 강하다. 모든 것을 태워버릴 만큼 세다. 그러나 분노에 사로잡힌 선택과 결정 그리고 이에 입각한 행동은 그 분노의 물결이 휩쓸고 지나가면 허탈과 회한을 불러일으킨다. 선거만 끝나고 나면 후회의 손가락들이 바다에 둥둥 떠다닌다는 괴담, 과거에도 정말 많이 듣지 않았는가.

이제 분노의 위력을 가라앉히고 부정의 힘을 극복하면서 정말로 냉철하고 침착하게 모든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2012년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는 ‘부정의 힘’만이 아니라 ‘긍정의 힘’도 작동시키면서 지독한 ‘노시보 효과’를 극복해 가는 지혜일 것이다.

윤창현 객원논설위원·서울시립대 경영학부교수 yun3333@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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