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이 만난 사람/정성희]‘태백산맥’ 작가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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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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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보수와 책임 있는 진보가 함께 가야 한다”

작가는 하얀색 바지저고리를 즐겨 입는다. 서재와 책상이 깔끔하게 정리돼 있어 작가의 성격을 말해주었다. 질문을 하면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표정이 풍부한 편이었다. 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
작가는 하얀색 바지저고리를 즐겨 입는다. 서재와 책상이 깔끔하게 정리돼 있어 작가의 성격을 말해주었다. 질문을 하면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표정이 풍부한 편이었다. 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
한 해가 저물어갈 무렵 경기 분당신도시 자택에서 만난 조정래 작가는 새 작품 집필을 위한 워밍업을 하고 있었다. ‘태백산맥’을 넘어 ‘아리랑’을 부르며 ‘한강’을 건넌 그는 중국을 무대로 한 새 소설을 준비 중이었다. 현대 중국시장을 무대로 한국 미국 중국 일본 유럽인들이 각축을 벌이는 내용이다. 책상 위에는 중국 소설들과 함께 중국에서 취재해온 메모가 가득한 수첩이 여러 권 놓여 있었다. 그의 사실주의적 문학이 꼼꼼한 현장취재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글씨도 성품이라는데 한 글자 한 글자가 다 반듯하다.

작가에 따라서는 나이가 들면서 문장을 써나가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사람이 있다. 조 작가는 “그런 건 아직 모르겠다”고 말한다. 1943년생인 조 작가는 올해 ‘70세’가 됐다. 만으로는 69세이지만 그는 우리 나이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요즘은 서양식 나이 표기를 하는데 그건 틀렸다. 태어나자마자 한 살이 되는 게 맞다. 우리 조상들은 임신하면 바로 태교를 시작했는데 그건 태아도 사람이고 나이 먹는다는 의미가 아니겠나.”

그는 아직도 원고지에 글을 쓴다. 몇 해 전 전남 보성군 벌교에 있는 ‘태백산맥문학관’을 찾아 ‘태백산맥’의 육필원고 1만6500장이 전시돼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재미있는 대목은 이런 원고지 더미가 두 부 있다는 점이다. 누런색 원고지는 조 작가가 쓴 원본, 약간 하얀색 원고지는 조 작가의 며느리가 필사(筆寫)한 것이다. 조 작가는 예비며느리에게 “우리 집안에 시집오려면 ‘태백산맥’을 필사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며느리는 3년 반에 걸쳐 이 약속을 지켰다. 그 시아버지에 그 며느리다.

“20대에 ‘짧은 일생을 영원 조국에’란 인생 좌표를 세우고, 포스코로 ‘제철보국’을, 유치원·초·중·고·포항공대까지 설립해 ‘교육보국’의 이상을 실현시킨 당신은 이 땅의 경제의 아버지, 교육의 신개척자. 한 점 사리사욕 없이 나라 위해 일평생을 바친 당신은 조국의 일꾼이며 민족의 위인이시다.”

작가 조정래가 쓴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비문(碑文)이다. 산업화 세력의 상징인 박태준과 대하소설 ‘태백산맥’으로 명성이 높아진 진보성향의 작가 조정래는 얼핏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박 회장의 고향은 경남 동래군 장안면(현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 먼저 도일(渡日)한 부친을 따라 여섯 살에 일본에 건너갔다. 조 작가는 전남 승주군(현 전남 순천시) 선암사에서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났다. 군인으로, 기업인으로, 정치가로 살아온 박 전 회장과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 사이에서 어떤 공통분모를 발견하긴 어렵다.

―어떤 경위로 박태준 전 회장과 교분을 쌓았나.

“한국 근현대사를 다룬 소설 ‘한강’을 쓰기 위해 여러 가지 조사를 했다. 1960년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이던 우리나라가 1979년 1만 달러가 됐더라. 그 30년 사이에 두 가지 큰 사건이 있었다. 첫째는 포항제철 건설, 둘째는 오일머니의 유입이었다. 산업화를 다루자면 포항제철을 빼놓고 소설을 끌어갈 수 없어 취재가 필요했다. 1990년대 초 박 회장이 광양제철 막바지 공사를 하고 있을 때 면담을 신청해 만났다. 이후로 최근까지 한 달에 한두 번꼴로 만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었다.”

―박태준은 어떤 사람인가.

“첫인상은 ‘쇳덩어리’ 같더라. 살면서 만나본 사람 중에 가장 눈빛이 형형했고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박태준은 외압에 의해 회사를 떠날 때도 ‘조상의 피값’으로 만든 회사라며 퇴직금 한 푼 받지 않았다. ‘철’이 제조업 중에서 이익이 가장 박(薄)한 기업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포스코는 최저 이율로 사원에게 주택을 제공하고 사원 자녀들에게 대학까지 학자금을 준다. 생각의 폭이 넓다. 역사, 현실, 분단과 통일, 정치 같은 주제에 대해서도 3∼4시간 동안 막힘없이 이야기를 풀어갔다. 고급스러운 유머를 체득하고 있었다. 이 양반은 절대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밥 먹듯 말을 바꾸어야 하는 정치를 혐오했다. 그런데도 정치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정치 외압으로부터 포스코를 지키기 위해서였으니 아이러니다.”

박 회장에 대한 조 작가의 존경심에선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이 느껴졌다. ‘태백산맥’이 이적성 논란에 휩싸여 있을 때 자신을 변호하던 박 전 회장을 언급할 때는 목소리가 떨렸다. 조 작가는 ‘태백산맥’과 관련해 우파 단체들로부터 국가보안법 및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해 11년간 조사를 받은 끝에 2005년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당시 주변 인사들이 조 작가를 가까이 하지 말라고 충고했으나 박 회장이 “그런 소리들 하지 마. 그 사람은 애국자고 민족주의자야”라고 호통쳤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태백산맥’에서 피를 튀기던 좌우 대립과 김범우의 고뇌가 시공간을 넘어 계속되는 것 같다.

“보수와 진보가 극한 대립을 하는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은 비극이다. 주의·주장이 다를 수는 있지만 상대방이 하는 얘기를 유심히 들어주는 태도는 갖춰야 한다. 내 주장을 할 때는 내 논리가 틀렸을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하고, 상대방 주장에서도 옳은 말은 들을 자세가 돼 있어야 하는데 이런 기본이 안 돼 있다. 건강한 보수와 책임 있는 진보가 함께 가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좌우로부터 함께 존경받는 분들이 없다. 내가 알기에 그런 분이 딱 두 사람인데 하나는 박태준, 다른 하나는 이어령이다. 박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을 그토록 소중히 여겼지만 ‘3선 개헌 지지성명서’에 서명을 거부했다. 그분은 경상도 전라도에 이어 북한 원산에 100만 t 규모의 철강회사를 짓기를 소망했다. 이어령은 내가 국가보안법 피의자 신분으로 출국 금지돼 있을 때 해외 취재를 할 수 있도록 힘써 주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이념으로 갈라져 상대 진영하고는 말도 섞지 않고 밥도 먹지 않는다. 박태준-조정래가 보여준 보수와 진보의 아름다운 동행은 우리 사회의 통합과 화해를 위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조 작가는 아내 김초혜 시인과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고, 그 아들이 아들 둘을 두었다. 손자 얘기가 나오자 만면에 웃음을 짓는 것이 영락없는 할아버지다. 그는 손자들과 그 친구세대를 위해 위인전을 쓰고 있다. ‘큰작가 조정래의 인물이야기’가 그것이다. 지금까지 신채호 안중근 한용운 김구 세종대왕 이순신 등을 썼다. 생존 인물 중에 유일하게 그가 쓴 위인전에 오른 인물이 박태준이다.

“험난한 역사 속에서 그래도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민족을 위해 자기를 희생시켰던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손자 세대가 그런 위인을 우러러 받들고 그 희생을 본받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박태준, 이분이야말로 위인의 기준에 들어맞는 사람이다.”

―김정일 조문을 어떻게 생각하나.

“1994년 김일성이 죽었을 때의 잘못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김일성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리기 이전에 그는 북한의 지도자였다. 그것도 우리가 정상회담을 하려고 기다리던 대상이었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은 마치 죽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대응했다. 이것이 북한에 부정적 메시지를 전달해 남북관계를 경색시키는 계기가 됐다. 다만 지금은 그때와 사정이 다르다는 점은 인정한다. 천안함 연평도 사태에 대해 북한이 사과하지 않았다. 특히 민간인이 있는 연평도를 향해 북이 포를 쏜 짓은 말이 안 된다. 정부가 안 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민간 차원의 조문은 다 풀어줘도 된다. 이희호 현정은 씨 말고도 정상회담을 했던 노무현 대통령을 감안해 권양숙 여사와 노무현재단이 가는 것을 허용했어야 했다.”

―올해 선거의 시대정신이 뭐라고 보나.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한 국무총리가 ‘지금은 축적의 시기이지 분배의 시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에는 ‘언젠가는 분배의 시기가 올 것’이라는 말이 생략돼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고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가 넘은 2010년대에 와서도 ‘분배’라는 말만 나오면 칼날을 세우고 신경질을 부리면 안 된다. 지금이 분배의 시기가 아니라면 도대체 언제까지 축적해야 한다는 말인가. 지금 국민은 30년 전 참을성 있던 그 국민이 아니다. 분배가 되고 사회안전망이 짜이면 내수가 살고 경제도 산다.”

그는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복지를 강조하는 것을 “정치권이 정신 차린 신호”로 해석했다. 정치민주화가 진전된 만큼 경제민주화가 이뤄져야 하고 그러자면 분배, 즉 튼튼한 복지를 설계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기업을 투명하게 경영하고 세금 탈루를 막고 정경유착을 근절해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조 작가는 2010년 ‘허수아비춤’을 통해 재벌의 정경유착과 횡포를 치열하게 고발했다.

―‘태백산맥’의 무대가 된 여순반란사건을 몇 살 때 겪었나.

“충격이 큰 기억일수록 평생 가는 것 같다. 일곱 살 때 아버지가 끌려 나가던 모습이 선명하다. 경찰서 앞 공터에 발을 디딜 수도 없을 정도로 탄피가 깔려 있고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즐비한 시신을 보았다. 내 인생 최초로 사회를 바라본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왜 싸울까. 그때 내 문학의 본질을 깨달은 것 같다. 지주와 소작인 간의 생존권 갈등이 ‘태백산맥’의 주제였다. 이것이 빈부격차로 이어져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러니 부자 증세(增稅)를 해서라도 갈등을 풀어야 한다.”

―요즘 청년들이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옛날에는 민주화가 급했으니 선배들이 공부 제쳐놓고 민주화에 투신했지만 지금 청년들이 사회문제 대신 자신의 문제로 눈길을 돌리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청년들은 오늘의 안락함을 누리는 것이 기성세대의 공로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환경이 다를 뿐 어느 시대건 경쟁은 있는데 경쟁이 힘들다고 불평을 하면 되나. 전쟁을 겪고 요행수로 살아남은 세대보다 지금 청년들의 상황이 더 나쁘다고 말할 수 있나. 너무 엄살 피우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는 고은 시인과 함께 노벨 문학상 수상 후보에 오르내린다. ‘태백산맥’과 ‘아리랑’이 프랑스어로 번역돼 나왔다. 하지만 그는 노벨상을 타려고 서구사회에 얼굴을 알리는 행위가 자존심 상한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노벨 문학상을 벌써 두 번 받았다”고 말한다. 17년 전에 어느 시민단체가 조정래가 노벨상을 타야 한다고 캠페인을 벌인 것과 7년 전 네이버에서 노벨 문학상을 탈 만한 사람을 뽑았을 때 그가 1등을 한 것을 말한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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