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성희]그리스發 우편폭탄의 난센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1월 12일 20시 00분


우리나라에서는 별 재미를 못 보았지만 영화 ‘나의 그리스식 웨딩’은 2002년 미국 개봉 당시 ‘진주만’ ‘아마겟돈’ 같은 블록버스터를 누르고 공전의 히트를 쳤다. 시카고에서 그리스식당을 운영하는 그리스계 노처녀가 미국 청년과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양국간 문화충돌을 코믹 터치로 그렸다. 여주인공 툴라의 아버지는 시집 못가는 딸을 못마땅해하다가 막상 미국 청년을 데려오자 그리스 남자가 아니라며 결혼 훼방작전에 나선다. 가족과 친지들이 서로의 삶에 깊이 관여하는 왁자지껄한 가족문화가 우리와 비슷해 공감이 갔다.

무책임한 과잉 복지가 부른 국가재앙

이 영화의 제작자는 명배우 톰 행크스다. 아내 덕에 그리스 문화에 이해가 깊은 그는 이 작품 외에도 ‘맘마미아’ ‘나의 로맨틱 가이드’ 등 그리스 3부작을 만들었다. 툴라의 아버지는 그리스가 민주주의, 철학, 천문학의 발상지라며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다. 영화는 미국적 개인주의 가치에 대한 가족 중심 가치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하지만 그리스가 2010년 현재 맞고 있는 재정위기를 극복해 해피엔딩을 보여주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올해 세계경제를 불안으로 몰아넣은 남유럽 재정위기의 근본원인은 방만한 복지제도에 있다. 그중에서도 그리스는 진원지가 될 만한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다. 최근 방문한 아테네에서는 일몰 후 열린 상점을 찾기 어려웠다. 제우스 청동상으로 유명한 국립고고학박물관에 가서 책자를 사려 했더니 박물관 숍이 닫혀 있었다. 지방선거(11월 7일)를 앞둔 아테네 중심가는 개혁조치에 반대하는 시위로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리스에는 직종에 따라 다양한 연금기금이 있다. 155개에 이르는 연금기금이 2008년 13개로 통폐합됐지만 기금이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다. 연금이 고갈되면 정부가 국고로 메워주고 국고가 비면 이웃나라에서 빌려다 미봉하는 무책임의 극치를 보인다. 연금과 건강보험이 하나로 통합돼 있어 한쪽이 부실해지면 다른 쪽도 바로 영향을 받는다. 그리스 최대의 민간연금기관인 IKA 관계자는 “우리 연금제도를 절대 따라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더 큰 문제는 부실 규모가 정확하지 않다는 데 있다. 그리스 정부는 지난해 1월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3.7%라고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에 보고했다. 그러나 재정적자 규모가 GDP의 6.0%(6월), 12.5%(10월)라는 보도가 나오자 그리스 정부는 마지못해 시인했다. 금년 4월 EU통계청은 14.6%라고 발표했고 결국 EU가 밝혀낸 최종 적자액은 GDP의 15.4%였다. 그리스 정부는 달러 및 엔화 표시 채권을 발행하면서 채무를 부채로 처리하지 않는 회계조작을 통해 부실규모를 숨기다 EU에 발각됐다. 회계의 불투명성이 대외 신인도를 크게 떨어뜨렸다.

국가 경쟁력 갉아먹는 친족연고주의

그리스는 공공부문의 비효율과 부패가 극심하다. 공무원과 공공기관 종사자의 임금이 민간부문보다 높고 근로조건도 훨씬 좋다. 놀랍게도 공공부문의 채용방식은 공채가 아닌 특채다. 어느 공직이 비게 되면 연줄이 닿는 공무원이 자신의 가족이나 친지를 채용하는 식이다. 자기들끼리 일자리를 나눠 갖고 연금까지 독식하는 시스템에 중독돼 있다. 영화 ‘나의 그리스식 웨딩’에서는 가족주의적 가치가 자랑이었지만 그리스 공공부문의 네포티즘(친족연고주의)은 국가 경쟁력을 흔들고 있다.

그리스 젊은이들이 세금인상 임금동결 등 개혁조치에 강하게 저항하면서 유럽 몇 나라 최고지도자와 아테네 주재 외국 대사관에는 그리스가 발신인으로 적힌 우편폭탄이 배달되고 있다. 지금의 위기를 반성의 계기로 삼기는커녕 개혁을 요구하는 외국을 공격부터 하는 그리스가 해피엔딩을 맞을 수 있을까.―아테네에서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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