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잔혹한 입시전쟁의 ‘마지막 고지’인 서울대 생명과학부의 교수다. 아니다. 한때 마지막 고지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또 하나의 고지가 점령되지 않은 채 구름 위에 떠 있다. 학생들은 의학전문대학원이라는 마지막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다. 어릴 적부터 그들의 꿈이었다고 한다. 부모가, 혹은 가까운 친지가 수재 소리를 듣는 학생에게 어릴 적부터 심어준 꿈이었을 것이다. 꿈을 이룰 날이, 마지막 고지가 코앞에 있는데 숨이 넘어가는 한이 있어도 달려가지 않을까.
나는 좋은 교수가 아니다. 그러나 학생에게 열정을 심어주려고 노력은 한다. 최근 내가 맡은 지도학생 10여 명을 대상으로 심층면담을 했다. 대학에 막 들어온 신입생도 있다. 얘기를 나누면서 학생들은 더는 내게 자신의 꿈 얘기를 들려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최근 재미있게 읽은 문학동네 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거짓말 학교’가 떠올랐다. 소설 속의 학교는 재능 있는 아이를 모아서 좀 더 창의적이고 위대한 거짓말을 하는 기술을 터득시켜 국가발전에 이바지하도록 정부가 지원하는 영재학교이다. 입시전쟁의 잔혹함, 그 속에서 서로 경계하고 질시하며 거짓말조차 방치해야 하는 학교 현장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대학입시 면접 때 반복해서 듣는 거짓말의 향연, 그것을 선생님이 가르치고 부모가 권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 대학교수는 무력감을 느낀다. 누가 더 감쪽같이 속이느냐가 점수에 1점이라도 보태진다면 잔혹한 전쟁터에서 누가 마다하랴!
나는 생명과학자가 된 것이 좋다. 그리고 내 즐거움을, 학문에 대한 열정을 기꺼이 학생과 나누고 싶다. 그러나 난 좋은 교수가 아니다. 다른 꿈을 꾸고, 다른 고지를 오르기 위해 내가 서 있는 정상을 잠깐 빌리러 온 학생의 닫힌 귀를 열 만큼 뛰어난 재주를 가지지는 못했다. 그들은 말한다. “잘 몰라요. 하지만 일단 의대를 가고 볼래요.” 아마 모두가 거기로 몰려가니까 자신도 가지 않으면 잘못될까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생명과학에 관심이 있어 생명과학부에 입학했던 학생조차도 구름 속의 마지막 고지를 향해 떠난다.
지난해 KAIST 생명과학과에서 졸업생이 단 1명도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았다고 해서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다. 서울대 생명과학부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올해 2월에 생명과학부를 졸업한 학생 64명 중 대학원에 진학한 학생은 15명이었다. 낮은 대학원 진학률보다 우리를 더 비참하게 만드는 사실은 대학원에 진학한 학생 중 85%가 사실은 의학전문대학원 시험에 떨어진 패잔병이라는 점이다.
누군가가 이 나라 생명과학의 미래를 묻는다면 눈을 들어 이들을 보게 하라고 외쳐야 하는 이 현실이 무섭고 부끄럽지 아니한가. 2005년 의전원 제도를 도입할 당시 왜 선배 교수들이 쌍수를 들고 반대했는지 이제야 깨우치게 되는 내 어리석음을 어찌할까. 교육부 관료들에게 간청한다. 제발 2005년 이전으로 돌려놓아 달라고. 대학이 더는 거짓말의 경연장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현실을 직시하자. 의전원 제도는 잔혹한 입시전쟁의 과열을 완화할 목적으로 교육 선진국이라 할 미국의 제도를 본떠 2005년부터 시행한 제도이다. 5년이 지난 지금 입시경쟁의 치열함은 완화되었는가. 고3 수험생의 수험생 기간만 4년 더 연장됐을 뿐이다. 학원시장은 노다지를 만났고 기초학문은 붕괴되고 있다. 의전원은 생물학 물리 화학 지구과학 등 기초과학 전공의 학생뿐만 아니라 약대 공대, 심지어 문과계열 학생조차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것이 학생뿐이랴. 우리나라의 미래도 함께 빨려 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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