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국민은 세종시에 죄지은 것 없다

  • Array
  • 입력 2010년 1월 17일 20시 00분


코멘트
“당명 개정은 국민과의 약속인 만큼 당명 개정에 나서겠습니다.”

2004년 7월 19일 한나라당 새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된 박근혜 전 대표(이하 박근혜)가 수락연설에서 다짐한 말이다. 물론 당명은 바뀌지 않았다. 이듬해 초 연찬회에서 의원 10여 명이 “(당의) 변화 없는 당명 개정은 무의미하다”며 반대했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당명 개정 표결 제안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10여 명의 반대에 주저앉았던 그가 지금 ‘국민과의 약속’을 들어 세종시 원안 추진을 주장하고 있다.

‘대못’을 지키는 야합의 정치

세종시 관련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충청지역은 세종시 원안 찬성이 많고 비(非)충청지역은 수정안 찬성이 많은 것으로 나왔다. 이해할 만하다. 그런데 동아일보 조사에서 이 문제를 ‘국민과의 신뢰 측면에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응답(55.5%)이 ‘국익 차원에서 보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응답(38.6%)보다 높게 나온 건 흥미롭다.

즉, 세종시가 특혜성 종합선물세트라는 것은 충청주민들도 인정할 정도지만 신뢰가 국익보다 중요하다는 국민감정이 세종시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신뢰의 정치인’ 박근혜가 원안 강행을 고수하는 것 역시 이런 정서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일 터다.

일찍이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이성이란 감정의 노예”라고 했다. 특히 정치적 뇌는 이성 아닌 감정에 따라 움직인다고 ‘정치적 뇌’를 쓴 미국 에머리대 드루 웨스턴 교수는 강조했다. 약속이나 신뢰, 초지일관 같은 말은 감정을 울리는 단어다. 반면 이익이나 경쟁, 변화와 개혁 같은 말은 긴장을 일으킨다. 글로벌 시대엔 경쟁을 통해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걸 이성적으론 알면서도 “그래, 너 잘났다!” 외치고 싶어진다. 2020년까지는 유럽을 가장 경쟁력 있는 경제지역으로 만들자고 주장하는 싱크탱크 리스본카운슬의 앤 메틀러 사무총장이 “경쟁력, 자유화, 친시장 같은 단어는 잘 안 먹힌다”며 ‘녹색 성장’이라는 말을 쓰자고 했을 정도다.

하지만 부지런한 미국의 학자들은 이를 또 뒤집는 연구를 열심히도 해낸다. 정치인에게 일관성이 중요하다지만 그것도 나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질 때 얘기라고 미 노스다코타대 심리학자인 케빈 매콜 교수는 지적한 바 있다. 정말 중요한 이슈에선 정치인의 말 뒤집기나 약속을 지키느냐가 문제 되는 게 아니라 지금 어떤 태도인지가 의미 있다는 것이다.

수정안이 발표된 뒤 박근혜는 “원안을 안 지킨다면 국민들이 앞으로 한나라당의 약속을 믿어주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그 원안은 나라의 이익에 맞지 않고, 그 약속이라는 것도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닌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못’을 지키는 일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수정안 안 되면 차기로 넘겨야

박근혜는 2003년 12월 한나라당이 손을 들어줘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이 통과된 데 대해 “국가 중대사를 놓고 충분한 공감대 형성이나 의견수렴, 타당성 검토가 없었다”고 공식 사과했다(2004년 6월 21일). 그러나 2005년 2월 23일 의총에서 신행정도시가 ‘권고적 당론’으로 채택되기까지 국민과의 공감대는커녕 당내에서도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하기 어렵다. 오죽하면 소속의원이 119명인데 찬성 46표, 반대 37표에 불과했겠나.

이 법을 밀어붙인 이유가 2006년 지방선거와 2007년 대통령선거용 충청표심 때문이라는 건 세상이 다 안다. 2005년 3월 2일 법안 졸속통과 이틀 후 행정도시법 처리와 과거사법 처리 유보를 놓고 여야 간 묵계가 있었다는 ‘빅딜설’이 불거졌고, 김덕룡 원내대표가 당직을 전격 사퇴했다. 당연히 물증은 없다. 그로부터 사흘 후 한나라당이 빅딜설을 언급한 정세균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했으며, 과거사법은 5월 3일 여야합의로 국회를 통과한 사실만 남아 있을 뿐이다.

앞으로 세종시 논란이 어디까지 번질지는 짐작하기 힘들다. 감정과 이성, 현재권력과 미래권력 사이의 갈등이 충청과 비충청의 나라 가르기로 비화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다만 이명박 정부가 행정부처의 세종시 이전 계획을 전면 폐기하는 대신 교육과학중심 경제도시로 바꾸는 세종시 수정안을 발표한 이상, 수정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현 정부에서 ‘세종시는 없다’는 점은 분명히해야 한다. 정 아쉽다면 미래권력을 자임하는 박근혜 측이 국가예산 지출 상한을 8조5000억 원으로 못 박은 세종시 원안을 들고 한나라당 대선 경선을 통과해 국민의 선택을 받으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표에 눈먼 정치인들이 계속 문제를 키워 수정안도 가고 행정부처도 가는 ‘세종시판(版) 용산 사태’의 반복을 근절하는 일이다. 비충청 사람들은 눈물이 날 만큼 질투 나는 수정안을 놓고 이렇게도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는 건 너무했다. 세종시에 죄지은 것도, 빚진 것도 없는 국민이 언제까지나 세종시에 죽는 시늉을 할 순 없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