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방형남]외교관 영어 실력

  • 입력 2009년 9월 24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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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 파월 전 미국 국무장관은 재임 시절 한국 외교통상부 장관을 만난 뒤 “다시는 저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며 짜증을 냈다. 한국 장관이 줄곧 준비한 메모를 읽는 바람에 제대로 대화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의 장관은 40년이 넘게 외교관으로 일해 영어 대화가 불가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발언 내용을 서면으로 준비했다는 옹호론이 있지만, 지금도 외교가에서는 영어실력의 부족으로 발생한 ‘대표적 사건’으로 회자된다.

▷외교부가 4급 이상 외교관 5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올해 상반기 영어회화시험(TOP)과 작문시험(TWP)에서 10명이 5등급, 1명이 등급 외 판정을 받았다. 시험 대상자의 19.6%가 ‘외교업무를 무난하게 수행할 정도’인 4등급에 못 미쳤다. 5급 이하 외교관을 대상으로 한 영어시험(TEPS)에서는 응시자 80명 가운데 45%인 36명이 5등급과 등급 외 성적을 받았다. 외교부는 다른 조직에 비해 높은 기준을 적용해 TEPS의 경우 4등급을 800∼899점으로 정했다. 그렇다 해도 외교관들의 상당수가 영어시험에서 낙제점을 받았다는 것은 실망스럽다. ▷외교관에게 외국어는 전쟁에 나가는 군인의 총과 같다. 기업을 비롯해 사회 각 부문에 외국어 전문가가 수두룩한 세상에 외교관이 외국어, 특히 세계 공용어나 다름없는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면 국가 경쟁력의 문제다. 제2외국어의 경우 사태가 더욱 심각하다. 주중 한국대사관 외교관 가운데 업무를 수행할 만한 수준의 중국어를 하는 사람은 5분의 1도 안 된다. 중국은 유난히 관계를 중시하는데 우리 대사관은 개인적 네트워크 구축이 가능할 정도의 중국어 실력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영어를 잘한다. 그래도 미국인들에게는 그의 영어가 탐탁지 않은 모양이다. 미국의 공중파 방송이 반 총장을 아직까지 인터뷰하지 않는 것은 그의 영어가 갑갑하게 들리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그만큼 완벽한 외국어 구사는 어렵다. 외국어에 능통한 외교관은 그래서 더욱 돋보인다. 캐서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가 한국어를 하지 못했다면 우리 국민과 정부의 호의가 지금보다 줄어들었을 것이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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