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교수의 법과 영화사이]'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 입력 2000년 7월 6일 11시 43분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1991)' 감독: 김유진 출연: 원미경, 이영하, 이경영 ▼

경관이 있다. 그는 강간예비범이고 가장이다.

그는 당신의 이웃이고 당신 오빠의 죽마고우다.

제딴에는 어떤 이상을 가지고 있다.

그가 장화를 신고 은빛 배지를 달고

말을 타고 권총에 손을 뻗칠 때

그는 이미 당신에게는 타인이다.

당신은 그를 잘 모르지만 그를 알아야만 한다.

그는 당신을 죽일 수 있는 기계를 가지고 있기에.

그래서 시간이 되면 당신은 그에게로 달려가야만 한다.

치한의 체액이 아직도 당신의 허벅지에서 끈적거리고

당신의 분노가 미친 듯 소용돌이 칠 때도

당신은 그에게 자백해야 한다.

강간당한 죄가 있다고.

미국의 여류시인 에이드리언 리치( Adrienne Cecile Rich 1931-) 의 시 「강간」(Rape 1972)의 구절이다. 김유진 감독의 작품「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는 리치의 시를 한국의 현실에서 확인하는 좋은 소재가 된다. 강간의 법리와 적용의 과정에 있어 뿌리깊은 여성에 대한 편견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작품이다. 80년대 후반에 지방 도시에서 발생한, 세칭 “키스 혀 절단 사건”으로 알려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고통받는 이 땅의 여성들에게 바친다”라는 헌사 자막이 영화가 의도하는 메시지를 명확하게 한다. 후반에 등장하는 여자 변호사(손숙)의 입을 통해 제기되듯이 한마디로 강간은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여성의 문제이라는 것이다.

스물 아홉 살의 임정희는 신체장애의 아들이 딸린 이혼녀이다. 반반한 얼굴보다도 심성이 더욱 고운 돼지 갈비집 안주인이다. 술을 곁들여 파는 종업원으로 일하다 역시 전혼에 실패한 경험이 있는 주인(이영하)의 청혼을 받아 안 주인이 된 것이다. 의붓아버지는 아내가 달고 온 아들을 극진히 대하는 드문 사내다. 내외는 억척같이 일하고 저축하면서 내 집 마련의 꿈을 키운다. 불행한 사건이 터지기 이전까지는 적은 액수나마, 형편이 허락하는 대로 꼬박꼬박 시어머니에게 생활비도 대주는 착실한 며느리이다. 사업자금을 빌려달라는 시누이의 무리한 요구도 부드럽게 거절할 줄 아는 지혜의 소유자이다. 불행한 사건은 시누이로 인해 일어난다. 건달 남편의 상습폭행에 시달리면서 친정에 찾아와 상습적인 하소연과 떼를 쓰는 시누이이다. 이날 따라 친정에까지 찾아온 남편에게 손찌검 당하고 집을 뛰쳐나가는 시누이를 달래러 따라나간 것이 화근이 되었다. 방탕기가 몸에 밴 시누이는 함께 소주잔을 나눈 후 자정이 넘은 시간인데도 억지로 떼를 쓰다시피 하여 올케를 디스코바에 끌고 간다. 바에서 일어난 일은 지극히 전형적인 스토리이다. 웨이터의 합석주선, 합석한 사내의 추근거림과 뿌리침, 모면한 위기 끝에 닥친 새로운 위기, 그리고 마침내 터지는 불행한 사고.

자신은 간신히 바를 박차고 나왔으나 시누이가 걱정이다. ‘홧김에 서방질’하는 시누이의 탈선 현장을 목격하고는 망연자실하고 사태가 진정되기를 기다리며 엉거주춤 길거리에 앉아있던 그녀를 마침 거리를 배회하던 대학 초년생 두 사람이 목격한다. 처음에는 거동이 불편한 것으로 여기고 도움을 줄 의도였을지 모르나 겨드랑이를 껴안고 살 냄새를 맡는 순간 이성을 잃는다. 위기를 감지하고 총총 귀가 길에 나선 정희를 곱게 보내 주지 않는다. “얼굴 한 번 죽여주는” 미끼를 그냥 보내기 아깝다고 합의한 둘은 밤길을 추적하여 강간을 시도한다.

리치의 시구대로 모든 남성이 강간범이 될 수 있다. 경관으로 상징되는 세속적 권위와 물리력을 가진 사내는 힘의 철학에 산다. 별스런 불량기가 노출되지 않은 착한 대학생이라도 언제나 강간범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사내가 자신의 존재와 힘을 과시하는 지배의 전형적인 수단으로 강간을 택하기 때문이다. 흔히 우발적인 성범죄로 치부하는 지극히 온정 어린 언어인 “우발적”이라는 수식어는 은연중에 강간이 자연스런 남성윤리의 표출임을 정당화시켜주는 법적 관용어이다.

반항하는 여인에게 심한 주먹질이 가해졌음은 물론이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독사의 혀가 날름거렸고 무의식중에 꽉 다문 이빨에 독사의 혀가 잘려나간다. “당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 기억밖에 없다.”는 심문시의 진술을 믿어줄 경관이 아니다. 각각 다른 응급실로 옮겨진 엇바뀐 가해자와 피해자, 의사의 석연치 않은 표정이 사건의 석연치 않은 진행과 결과를 예고해 준다. 뒤늦게 허겁지겁 나타난 시누이의 간청으로 정희는 집안문제로 둘이서 육탄전을 벌였다고 남편과 의사에게 이야기한다.

벙어리가 된 청년의 부모가 정희를 상해죄로 고소한다. 길가는 아이를 성적으로 유혹하고는 혀를 ‘물어뜯어’ 상해를 입혔다는 주장이다. 분통이 터질 억울함에 맞고소하겠다는 아내의 결의에 남편은 묵묵히 돌아누울 뿐이다. 착한 남편도 감당하기 힘든 부담이다. 끝내 맞고소를 제기한다. 강간치상의 죄목이다. 몸체의 ‘침입’에 실패하여 비록 강간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 과정에서 사람이 다치면 강간치상죄에 해당하는 것이 법이다. 조사를 담당한 형사는 물론 남자이다. 리치의 시구대로 그 또한 강간예비범이다. ”:아주머니! 강간하려던 놈이 어떻게 고소를 합니까?“ 지극히 편파적인 수사태도이다. 가부장제와 남성적 윤리가 지배하는 사회는 강간당한 여성을 감싸주고 약탈당한 권리를 보상해주기는 커녕 오히려 불행을 당한 여성의 죄를 문책한다. “누가 알아, 진짜로 당했는지?” 동네 아낙네들의 수군거림 또한 타인의 불행이 확대되는 것을 보고싶은 인간의 추한 본능이다. 유부녀 강간범을 법전에도 없는 ‘가정파괴범’으로 부르는 언론의 관행도 주부가 불행한 강간을 당하면 곧바로 가정이 파괴되어야 한다는 남성적 관념의 소산이다. 환향녀(還鄕女)의 서글픈 역사의 유습이 아직도 엄연히 살아 있는 것이다.

공개법정에서 감추고 싶은 사적인 사실이 속속 밝혀진다. 억지로 감추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던 정희의 과거가 재판의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현장검증이 행해지고 자신의 범행을 은폐하려는 어린 사내들의 거짓에 말문이 막힐 뿐이다. 법정은 “ 혀가 잘린 전도가 만리 같았던 대학생”과 한밤중에 술에 취한, 이혼과 술장사의 경력이 있는 느슨한 여자, 둘 중에 누구의 손을 들것인가? 1심 법원은 형법과 폭력행위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을 적용하여 쌍방 모두를 유죄로 판정하고 징역의 집행유예 판결을 내린다. 대학생에게는 폭행의 죄과를 물었고 정희에게는 정조를 방위하기 위해 혀를 절단한 ‘과잉방위’의 책임을 물은 것이다.

재판의 후유증은 심각하다. 어떤 손님들은 “사내 후리게 생겼어” 라고 뒤통수에 대고 수군대기도 하고 , 때때로 남편에게 노골적인 협박과 조롱의 전화를 걸어오는 사내도 있다. 시어머니는 아들에게 “몸 놀리고 나다니다" 화와 망신을 자초한 계집이니 이혼하라고 노골적인 압력을 넣고, 친구도 ”여자는 또 구하면 된다“라면서 아내를 버릴 것을 종용한다. 학교에서 놀림받는 아들과 “ 감당할 능력이 없다”며 가게마저 내놓고 번민하는 남편을 보면서 더욱 실의에 빠져 있는 정희에게 여자 변호사가 등장하면서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깨무는 것”과 “물어뜯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가 라는 선문답 같은 논제를 끌어내면서 변호사는 정희를 설득한다. “당신 혼자 당한 것이 아니다. 모든 여성이 당한 것이다.”

고등법원에서 본격적인 논쟁이 벌어진다. “보호할 가치가 없는 정조”와 “생명과도 같은 정조” 사이의 수사의 논쟁이 어쩐지 진부하게 느껴져 현실감을 떨어뜨리는 게 영화의 흠이다. “생명과도 같은 여성의 성”이라는 변호사의 수사는 傳家의 銀粧刀이나 이제는 그 누구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고사성어에 가깝다. “보호할 가치가 없는 정조”라는 검사와 상대방 변호사의 말은 1950년대 세상을 소란하게 했던 희대의 플레이보이, 박인수 사건의 재판에서 유래한 말이다. 오늘날에 가부장제 윤리의 극대화를 상징하는 이런 표현을 당당히 법정에서 사용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사실관계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면서 정희의 고통은 더욱 가중된다. 반대측 증인으로 전 남편이 나서서 결혼생활이 파탄으로 끝난 책임을 정희의 희박한 정조관념 탓으로 돌렸다. 카바레 종업원이 외간남자와 합석한 사실을 증언한다. 상대방 변호사(이경영)는 강압적인 질문을 퍼부으면서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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