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교수 부당지시 거부했더니… 돌아온 건 잡일 그리고 비아냥”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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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인문학도들의 학계현실 고발
역사학대회 사전 행사로 첫 진행

27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에서 열린 ‘제60회 전국역사학대회’에서 신진 인문학 연구자들이 한국 학계의 문제점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전국역사학대회협의회 제공
27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에서 열린 ‘제60회 전국역사학대회’에서 신진 인문학 연구자들이 한국 학계의 문제점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전국역사학대회협의회 제공
“지도교수가 불렀다. 자신이 데리고 있는 외국인 학생의 논문이 무조건 통과돼야 하니 도우라는 지시였다. 납득이 안 돼 따르지 않았다. 돌아온 건 서류 복사와 영수증 챙기기 등 잡일뿐이었다. ‘요즘 애들은 공부 참 편하게 한다’는 비아냥거림까지. ‘시대 잘 만나 편하게 교수 됐네요’라고 되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도 익명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인문학 석사 과정 A 씨)

27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 백주년기념관 국제원격회의실. 2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까지 신진 인문학 연구자 50여 명이 자리를 메웠다. 이들은 자신의 삶과 비슷한 이야기에 박장대소를 터뜨리기도 하고, 때론 한숨을 같이 내쉬기도 했다.



이곳은 역사학계의 최대 연례행사 전국역사학대회의 사전 행사로 열린 ‘학문후속세대의 이상과 현실’ 발표장. 60회째를 맞은 역사학대회는 올해 처음으로 독특한 시도를 했다. 한국 인문학계의 현실을 젊은 인문학도의 시선으로 비판한 연구 세션을 진행한 것이다. 정태헌 전국역사학대회협의회장(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은 “한국사와 한국 사회가 역사적으로 전환기일 뿐 아니라 학계 역시 큰 변화에 직면하고 있다”며 “학계를 제대로 비판하고, 젊은 학자들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어 처음으로 마련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 행사는 기성 학자들이 아닌 젊은 역사학 전공자들의 모임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가 주관했다.

가장 크게 지적된 것은 한국 학계의 고질적인 갑질 문화와 노동력 착취였다. 연구와 상관없는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기 힘든 대학원생들의 열악한 환경이 결국 한국 인문학의 경쟁력을 갉아먹는다는 비판이다.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국가장학금을 받으려면 4대 보험을 가입해선 안 된다. 제대로 된 사업장에서 아르바이트조차 할 수 없다. 그나마 학회 간사, 조교라도 하면 다행이다. 하지만 최저임금을 지킨 경우는 본 적이 없다. 이 구조와 시스템은 오랫동안 변하지 않을 것이다.”(인문학 박사 과정 B 씨)

이날 토론자로 나선 신정욱 전 동국대 대학원총학생회장(30)은 “대학원생을 단지 ‘학생’으로 규정하면서 신진 연구자들의 활동 대가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며 “연구자들이 연구 노동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에 상응하는 정당한 보상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 학계에 만연한 ‘순혈주의’와 성차별 문제도 함께 제기됐다.

“타교 출신에 전공도 다르다. 더군다나 여자다. 모든 프로젝트에서 ‘없는 사람’ 취급 받는 게 당연해진다. 학문의 최고 과정이라는 대학원에서 오히려 인간성의 최악을 경험한다.”(인문학 박사 과정 C 씨)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젊은 인문학도의 학계현실 고발#제60회 전국역사학대회#신진 인문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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