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플러스/드라마캐릭터열전]‘나쁜 의사’ 이강훈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월 6일 11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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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움직임 속에는 냉기가 서려 있다. 좀처럼 속내가 드러나지 않는, 그래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차가운 얼굴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거부한다. 게다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패기 넘치는 자신감은 도도함을 넘어 시건방져 보인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이토록 냉정하고 도도하면서 시건방진, 좀처럼 가까이 할 수 없는 안하무인의 냉혈한으로 만든 것일까?


의학드라마 '브레인'(윤경아 극본, 유현기-송현욱 연출)의 주인공 이강훈(신하균 분)의 오만방자한 행태를 설명하기 위해 경제적 궁핍에서 비롯한 콤플렉스 또는 트라우마를 언급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것은 아닐까?

이강훈은 대한민국 최고 명문 의대 신경외과의 '최연소 조교수'가 되겠다는 야망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이다. 모든 걸 가지고 태어난 사람에게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을 최연소 조교수라는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그 타이틀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자신의 존재감을 다른 사람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가 의사의 길을 선택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이다. 의사가 대한민국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직업이라는 속물적 판단이 그로 하여금 의사의 길을 가게 만든 것이다. 뇌수술 도중 집도의의 실수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기억 때문에 의대에 진학하게 되었다는 그의 주장은 자신의 속물 근성을 합리적으로 포장하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갖고 태어난 자와 맞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야 한다는 비뚤어진 자의식이 '최연소 조교수'로 '최고의 신경외과의'가 되겠다는 야망을 갖게 한 것일 뿐이다.

이강훈의 내면을 지배하는 것은 경제적인 궁핍에서 비롯한 콤플렉스 또는 트라우마가 아니다. 만약, 김상철(정진영 분) 교수의 표현대로 이강훈이 명예와 권력에 집착하는 콤플렉스 덩어리라면, 그는 평범한 성장 드라마의 정형적인 인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브레인'의 이강훈이 돋보이는 것은, 태생적 결핍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인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강훈의 내면은 지독한 외로움이 지배하는 황량한 벌판과도 같다.

세상에서 믿을 건 오직 자기 자신 뿐이며, 근원적 결핍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세상에 자기 존재를 알리는 것이라는 그릇된 판단이 이강훈을 괴물로 만들었다. 지독한 외로움에 사로잡힌 사람은 근본적으로 사랑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이강훈이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배려를 자신에 대한 값싼 동정심으로 매도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이강훈이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성장 환경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집을 나갈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절박함보다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이 더 크게 다가왔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사랑을 불신하게 만든 것이다.

사랑을 부정하면 할수록 자기 연민의 감정에 함몰되기 쉽다. 주변 사람들의 배려와 관심을 거부하면서 자기 연민에 빠진 이강훈의 행동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어머니가 챙겨주는 사골 국물을 냉장고에 쟁여 놓은 채 썩히는가 하면, 하나 뿐인 동생이 병원에 찾아오는 것에 질색하며 가족을 부정한다.

출생부터 경제적, 사회적 처지가 달랐던 동료의사 서준석(조동혁 분)의 우정 어린 배려에는 자신이 그보다 실력이 월등하다는 자만심으로 대응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챙겨주는 후배 전공의 윤지혜(최정원 분)의 애정 어린 관심에는 사랑 따위엔 관심 없다며 외면한다.

그리고 신분 상승의 도구로 이용하라는 재벌가 딸 장유진(김수현 분)의 일방적인 애정 공세에는 자신은 결코 그런 속물이 아니라며 도도한 태도를 유지한다. 주변 사람들의 배려가 아닌, 자신의 힘만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남들 앞에 내세울 것이 없는 자신을 숨기려는 본능과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이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이상한 행태들인 것이다.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거부하는 이강훈이지만, 정작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접근하여 아부를 아끼지 않는 면모를 갖고 있기도 하다. 자신의 성공을 보장해줄 대학병원의 실세인 고재학(이성민 분) 과장이나 신경외과 전문의로 명성이 자자한 김상철 교수에게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최연소 조교수' 임용을 받기 위해 자신이 준비하던 논문 주제를 고재학 과장에게 넘기는가 하면, 수술 원칙을 지키지 않아 김상철 교수에게 받은 수술 금지 처벌을 어기면서까지 응급환자 수술을 집도할 정도로 그는 거침없이 행동한다.

대한민국 최고의 신경외과 전문의로 존재감을 인정받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그의 이기적인 태도는 종종 조직의 규율과 원칙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권력과 명예를 쟁취하여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위한 것으로 인식되는 것도 그래서이다.


그러나 기득권의 질서가 엄존하는 현실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 왜곡된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탄생시킨 21세기 귀족은 기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출신 성분을 따지면서 계층 간의 이동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의 능력보다 출신 가문이 앞서는 21세기 봉건시대에 '천출(賤出)'의 기득권 질서 편입은 좀처럼 허용되지 않는다. 실력을 인정할 수는 있으나, 태생적 한계를 지우지 못한 존재감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강훈의 이기적이고 괴팍스러운 행동 양태는 바로 이런 현실에 대한 자각과 그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에서 비롯한다. 좀처럼 기득권의 질서에 편입될 수 없다는 현실 인식에서 비롯한 이강훈의 증오심은 자신의 존재를 모두에게 각인시켜야만 한다는 강박증으로 이어진다.

이강훈은 결코 명예와 권력 그 자체를 욕망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에게 명예와 권력은 단지 기득권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김상철 교수의 논리로 선의의 얼굴 표정 뒤에 숨긴 가식을 드러내라고 김상철 교수를 공격하는가 하면, 자신이 사표를 제출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 고재학 과장에게 단호하고 냉정한 태도로 사표를 제출하는 이강훈의 행동은 결코 명예와 권력에 집착하는 야심가의 태도라 할 수 없다. 자신을 출세의 도구로 이용하라는 장유진의 제안을 거절한 것도 그가 출세에 눈이 먼 속물이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세속적 욕망에 사로잡힌 인물에게서 볼 수 없는 이강훈의 행동 양태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비뚤어진 공격 심리에서 비롯한다. 존재감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자기 방어 심리가 상대방을 가리지 않고 극단적으로 공격하는 성향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를 미워할 수 없다. 사랑을 받지 못해 사랑을 신뢰하지 않는, 그래서 애정 결핍을 자초하고 자기 연민의 감정에 함몰되어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배려를 거부하고, 오로지 자기 존재감만 앞세우면서 기득권이 지배하는 세계를 향한 투쟁 의지를 불태우는 이강훈은 21세기 봉건시대의 슬픈 초상(肖像)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향한 이강훈 식 복수 방법은 자신의 존재감을 세상에 각인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이강훈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수술 도중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의사가 누구인지 밝혀내고자 하는 집요함, 치유 불가능한 상태의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그토록 증오하던 김상철 교수에게 무릎 꿇고 애걸해야 하는 절박감은 이강훈을 움직이는 동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약물중독에 걸려 수시로 폭력을 행사하던 아버지와 어린 아들을 버리고 집을 나간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강훈에게 감정을 이입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것도 그래서이다.

어쩌면 이강훈 역시 자신이 왜 그토록 처절하게 몸부림쳐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는 정신과 진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냉소와 격정의 감정 기복이 정상의 범주를 넘어선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극적 맥락 속에서 일관성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균열이 있는 이강훈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것은, 과장된 감정을 절제하면서 순간적으로 폭발시키는 배우 신하균의 연기력이다. 만약 신하균이 아니었다면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없는 시대'가 만들어낸 괴물과도 같은 이강훈은 존재감을 인정받기 어려웠을 것이고, '브레인' 역시 기존 의학드라마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범작에 그쳤을 가능성이 높다.

지극히 냉정한 태도를 견지하다가 자신의 존재감이 무시당하는 순간 폭풍 같은 분노로 격정에 사로잡히는 이강훈에게 공감과 연민의 시선을 보낼 수 있게 해준 신하균은 기립박수를 받아 마땅한 배우이다. 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드라마평론가 drama@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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