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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일근무제 본격 시행]<2>역시 가족이다

입력 2004-06-28 18:59업데이트 2009-10-09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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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가족을 그렸는데, 아내를 중심으로 아들과 딸이 좌우에서 웃고 있고 저는 도화지 귀퉁이에 있더군요. 눈 흰자위 부분은 빨갛게 칠했고요. 늘 술에 취해 있는 아빠 모습이라나. 그런데 얼마 전 제가 가족 중간에서 웃는 모습으로 있는 그림을 봤습니다. 코끝이 찡하더군요.”

S그룹의 장모 차장(39)은 2002년부터 회사가 실시한 주5일 근무제 덕분에 ‘하숙생’에서 ‘아버지’로 지위가 격상했다. 그는 토요일 오전에는 맞벌이 아내의 집안일을 도와주고 오후에는 어김없이 가족과 함께 서점이나 전시관을 찾는다.

주부 김모씨(38·경기 고양시 일산구 주엽동)는 남편 회사가 주5일제를 실시한 이후 우울증만 깊어졌다. 남편은 이틀 내내 도무지 집에서 궁둥이를 들려고 하지 않는다. 가장 편안한 옷차림으로 TV 리모컨만 만지작거리다 일요일 저녁에 외식하는 것으로 가장 역할을 다했다는 태도다. 가계부를 끄집어내면 돈 얘기 하지 말라고 역정이니 울화통만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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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주5일 근무제를 가족생활을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도화선으로 설명한다. 이 제도를 먼저 실시한 서양에서는 식당 이름으로도 유명한 ‘오 금요일, 신이여, 감사합니다(TGIF·Thanks God, It's Friday)’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기독교계 시민단체인 하이패밀리의 이의수(李義壽) 사무총장은 “주5일 근무제는 일을 하기 위해 살던 시대에서 온 가족이 행복을 위해 사는 시대로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계기”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틀연휴 시대를 준비하지 않으면 숨어 있던 온갖 갈등이 불거져 나와 가정이 파괴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주5일 근무제가 주말여행을 보편화시키는 등 가족관계를 질적으로 변화시킬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평등개념’이 자리 잡지 못하면 오히려 가족간 불화가 늘어날 수도 있다고 충고하고 있다.-동아일보 자료사진

▽가정 회복의 계기=주5일 근무제는 아버지가 ‘직장형 인간’에서 ‘가장’으로 되살아나며 삶의 질이 선진국형으로 바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한다.

주말에 가장이 집안을 수리하고 아내의 일을 도와줄 여유가 생긴다. 가족마다 ‘토요일 취미생활, 일요일 종교생활’ ‘금요일 오후부터 2박3일간의 주말여행’ 등 나름의 연휴를 통해 가족문화를 만들 수 있다.

선진국에서는 △취미생활을 직업 수준으로 하는 프로슈머(Prosumer·생산자를 뜻하는 Producer와 소비자란 의미인 Consumer의 합성어) △자녀의 문화교육을 위해 틈만 나면 자녀와 함께 공연장, 미술관 등을 찾는 ‘문화족 마마’ 등의 새로운 인간 유형을 낳기도 했다.

직장에서는 일본에서 일어난 ‘하나모쿠(花木) 현상’이 한국에서도 재연될 공산이 크다. 이는 직장인이 금요일 오후부터 가족과 주말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모든 행사를 목요일에 집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술자리가 줄고 직장인 문화의 축이 평일 밤에서 주말로 바뀌게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주5일제의 그림자=일단 2002년 가족자원경영학회의 조사는 이 제도가 가정에 활력소가 되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조사 자체가 외환위기 상황에서 벗어나 경제가 회복되고 급여가 정상적으로 나올 때 실시된 것이라는 한계가 있다.

불황이 지속돼 경기가 좋지 않으면 사정이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1994년 독일 폴크스바겐의 주공장이 있는 볼프스부르크시에서는 실업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급여를 줄이고 주5일제에서 주4일제로 변경하자 이혼이 60% 증가했다. 당시 독일의 사회학자들은 “하루의 여유가 가족의 숨겨진 갈등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한다”고 흥분했다.

경제적인 요인이 아니더라도 부부가 같이 있는 시간이 갑자기 늘어나면서 갈등이 증폭돼 이혼이 증가할 가능성도 높다. 선진국에서는 ‘바캉스 이혼’이라고 해서 여름휴가 후 이혼율이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이탈리아에서는 여름휴가 직후인 9월과 10월에 이혼율이 30%나 급증하는 것으로 나타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당시에는 가족휴가 때문에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게 된 ‘불륜’ 연인들 사이에 문자 메시지 교환이 늘고, 이에 따라 들통 나는 확률도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분석됐지만 부부가 같이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 갈등이 커졌음도 부인할 수 없는 요인이다.

하이패밀리의 이 사무총장은 “가정이 화목하지 않으면 주말의 여유시간이 ‘묻지마 관광’ 등 퇴폐문화를 부추기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TGIF 시대’를 위해서=가족이 주5일 근무제에 대비해 계획을 짜고 준비를 해야 이 제도를 가정이 살아나는 계기로 만들 수 있다.

공기업에 근무하는 맞벌이 주부 이모씨(37·서울 마포구 아현동)는 벌써부터 늘어날 이틀연휴가 고민이다. 이씨는 “일요일 하루 아이 보고 청소하고 일주일 동안 남편이 입을 드레스셔츠 다리느라 피곤한데 그 일을 이틀간이나 해야 할 형편”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반드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가족간의 평등한 관계에 대한 개념이라고 지적한다. 모든 가족원이 일할 때는 함께 일하고 쉴 때는 함께 쉴 수 있는 공정함(fairness)에 대한 개념이 먼저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방송통신대 김외숙 교수(가정학)는 “1980년대 일본에서 처음 주5일제가 시행됐을 때 주부들의 불만이 가장 많았다”며 “가족 구성원의 생각이 민주적이고 남녀 평등한 쪽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전문가들은 정부의 역할이 절대적이라고 지적한다.

영국에서는 1973년 공공부문 여가시설을 여가센터로 통합하고 여가관리사 제도를 도입했고, 일본에서는 이틀 연휴제가 본격 실시되기 20여년 전인 1972년 재단법인 여가개발센터를 설립해 체계적으로 국민의 여가생활을 돕는 준비를 했다.

이성주기자 stein33@donga.com

강수진기자 sjkang@donga.com

▼늙으신 부모들 소외없게 함께 시간 보내야▼

가족이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수록 가족관계는 더욱 좋아질까?

가족자원경영학회에서는 2002년 금융권과 일부 기업체에서 주5일 근무제가 처음으로 도입된 직후 그 직원과 배우자 182쌍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당시 응답자의 37%가 여가시간이 늘어난 이후의 가장 큰 변화로 ‘가족관계의 개선’을 꼽았다. 남편의 74.7%, 아내의 76.4%는 이 제도가 부부 관계를 개선시켰다고 응답했다. 또 금실이 좋아진 덕분에 남편의 19.1%, 아내의 18.7%는 성관계 횟수가 증가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결과를 좀 더 살펴보면 갈등의 여지를 안고 있다. 아내의 27.5% 정도가 가정 내에서 역할부담이 증가했다고 응답한 반면 역할부담이 늘어났다는 남편의 비율은 10.4%에 그쳤다.

또 부부의 평균 주말 가사노동시간을 비교해 보면 남편이 토요일 1시간22분, 일요일 1시간35분이었던 반면 아내는 토요일 약 4시간33분, 일요일 약 4시간42분으로 나타났다.

가족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아내(엄마)의 일은 더 늘어난다는 의미다.

75%가 부부간 대화시간이 늘어났다고 응답했으나 잔소리나 말다툼 등 갈등을 표출한 대화까지 포함하고 있어 반드시 바람직한 증가라고는 볼 수 없다.

또 전체 응답자의 81%가 외식비가 늘었다고 대답하는 등 평균 25만원을 더 쓴 것으로 나타났다.

많은 학자들은 주5일 근무제 실시 이후 오히려 부부간의 잠재된 갈등이 표출됨으로써 가족관계가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또 한국여가문화학회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여가활동을 함께하는 사람’으로 ‘자녀를 포함한 부부’(73.8%)가 첫손에 꼽혔다. ‘부모님과 함께한다’(0.5%)는 응답은 거의 없어 여가시간 증대가 노인 소외문제에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주5일 근무제 도입과 함께 가족의 삶의 질 향상이라는 측면에 가려져 있는 공정하지 않은 가족관계나 소외된 가족원의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윤소영 송호대 교수·사회복지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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