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연의 스타이야기]밉지 않은 욕심쟁이, 헬렌 헌트

입력 2001-02-15 18:37수정 2009-09-21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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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피는 붉지 않을 것이다. 할리우드를 뒤흔드는 대부분의 여성 스타들이 '뜨거운 피'로 뭇 남성들의 심장을 멎게 했다면 그녀의 전략은 다르다. 그녀는 붉고 뜨겁기보단 희고 미지근한 피로 관객들의 가슴에 온기를 지폈다.

◆묻혀 있어서 더 아름다운 그녀

헬렌 헌트. TV 스타에서 영화배우로 전업한 그녀는 묻혀 있어서 더 아름다운 스타다. 최근 그녀의 출연작이 시간차 공격을 하듯 세 편이나 내리 국내 극장가를 침공했지만 어느 누구도 헬렌 헌트 그 자체를 주목해주진 않았다. <캐스트 어웨이>는 '톰 행크스의 원맨쇼'라는 말로 그녀의 존재 자체를 무화시켰고 <왓 위민 원트>는 '여자 마음을 알게 된 남자'라는 홍보문구로 그녀의 중요성 농도를 희석시켰다.

두 영화에 비하면 곧 개봉될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는 좀 나은 편이다. 헬렌 헌트는 케빈 스페이시, 할리 조엘 오스먼트와 묶여 '연기파 배우의 결합'이라는 상찬을 들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헬렌 헌트에겐 빈약한 대접일 뿐이다. 케빈 스페이시는 매 촬영마다 4시간이 넘는 분장을 감수한 덕분에 특별한 대접을 받았고 <식스 센스>의 아역 스타 할리 조엘 오스먼트는 나이 보다 훨씬 원숙한 연기로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헬렌 헌트는 비록 훌륭한 연기를 펼쳤지만 주목받을 만큼 특별한 그 무엇을 보여주진 않았다. 그녀는 매번 잭 니콜슨, 톰 행크스, 멜 깁슨, 케빈 스페이시 뒤에 숨겨진 충실한 조력자였을 뿐이다.

그러나 헬렌 헌트에게도 한때 주목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97)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을 때 그녀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시절을 보냈다. 영국 출신의 네 배우를 제치고 오스카 여우주연상의 영예를 안은 그녀는 그해 <피플>지가 선정한 '가장 아름다운 배우 50인' 중 한 사람이었다.

자기 안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멜빈(잭 니콜슨)의 얼어붙은 심장마저 녹여주었던 여자 캐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캐롤을 연기한 후 그녀의 삶은 많이 달라졌다. 할리우드 스튜디오 관계자들은 밋밋한 TV 스타로 낭비될 뻔한 그녀의 재능을 드디어 알아봤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이후 출연작이 쇄도한 그녀는 99년 겨울과 2000년 겨울 사이 무려 4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녀는 욕심쟁이

욕심이 하나도 없을 것 같은 그녀는 마음속에 온갖 열정을 다 감추고 산다. 그녀는 여태껏 이뤄 놓은 이 많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자기 앞에 당도하길 꿈꾸고 있는 것 같다.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인생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인생에서 원하는 건 딱 세 가지예요. 뭔가 날 흥분시키는 일을 찾는 것, 연극이나 뮤지컬 무대에 서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바로 감독이 되는 것이죠. 배우, 감독, 작가로 열심히 일하고 싶어요. 이것 말고도 전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죠. 일일이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196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L.A.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욕심이 많았다. TV 감독인 아버지와 사진작가인 어머니를 둔 덕분에 일찍부터 연기에 눈을 뜬 그녀는, 6세 때 이미 배우가 될 꿈을 키웠다. 그 무렵 그녀가 선망했던 배우는 얼음처럼 냉정한 아름다움을 갖춘 잉그리드 버그먼이다.

배우 데뷔는 9세 때 이루어졌다. 연기 수업을 마친 그녀는 곧 에이전트를 고용했고 TV 드라마 <여성 개척자>(Pioneer Woman)의 배역을 따냈다. 그후 그녀는 줄곧 TV 스타였다. 86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페기 수 결혼하다>에서 페기 수의 딸로 출연한 적은 있지만 잉그리드 버그먼 같은 멋진 영화배우가 되기까지 그녀는 먼 우회로를 걸었다. 반면 TV 드라마에선 승승장구, 92년 방영되기 시작한 <결혼 만들기>(mad about You)는 그녀를 스타의 자리에 성큼 앉혀놓았다. 헬렌 헌트는 이 드라마로 에미상을 수 차례나 수상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시절

그 무렵 그녀에겐 영화배우로 거듭날 몇 번의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베티 토마스 감독의 <온리 유>(92)에선 클리프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사진작가를 연기했으며 장 드봉 감독의 <트위스터>(96)에선 토네이도의 기류를 연구하는 기상학자를 맡아 열연했다.

그리고 드디어 찾아온 영화가 바로 잭 니콜슨과 공연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다. 그녀는 <트위스터>에 출연하기 전부터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 출연하기로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시나리오가 너무 마음에 들었고 제임스 L. 브룩스 감독, 잭 니콜슨과 함께 하는 영화라는 사실에 꽤 흥분해 있었죠."

이제 먼 우회로를 거쳐 드디어 확고한 영화배우로 자리잡은 그녀는 감독들이 가장 선호하는 여배우로도 유명하다. 요령 같은 건 피울 줄 모르는 진짜 노력파 연기자가 바로 그녀이기 때문이다. 겸손함이 몸에 밴 그녀는 항상 이런 식이다.

"전 일하는 게 정말 즐거워요. 연기할 때마다 뭔가 배운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일을 하면서 더 많은 경험을 쌓아나간다는 사실이 날 흥분시켜요. 상대 배우에게도 많은 걸 배울 수 있고. 따지고 보면 세상엔 정말 배울 것 투성이에요. 일이든, 사람이든. 그들은 여태껏 내가 갖지 못했던 많은 걸 원 없이 보여주니까요."

올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 그녀는 이제 좀 쉬고 싶다고 말한다. 우디 앨런 감독이 연출한 'The Curse of the Jade Scorpion'를 마지막으로 당분간 좀 쉬면서 책이나 읽고 싶다고. 그 후 어쩌면 우린 그녀를 연극무대에서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내 연기에 영감을 주는 건 연극"이라며 "아직 서 보지 않은 연극무대에 한 번 도전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이야기했다. "훗날 극장대표가 되고 싶기도 하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욕심을 부려도 밉지 않은 그녀는 이혼의 아픔을 겪은 후에도 여전히 밝은 모습으로 삶에 도전하고 있다. 밉지 않은 욕심쟁이 헨렌 헌트는 '붉은 피'의 열정이 아니더라도 여전히 매력적인, 이웃집 언니처럼 포근한 스타다.

황희연<동아닷컴 기자>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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