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의 우리거리 읽기]서울 태평로

  • 입력 1999년 5월 24일 19시 09분


`노인은 홀연히 나타났다. 그리고는 십리를 더 가서 도읍을 정하라고 일러주었다. 일러준 대로 걸음을 옮기던 무학대사가 뒤를 돌아다 보았을 때 노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왕십리(往十里)라는 지명의 유래는 표면적인 이야기다. 초인적인 존재가 궁궐터를 점지했다는 사실이 넌즈시 암시되는 내용이다. 쿠테타로 집권한 세력은 거사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했다. 하늘의 뜻이라고 선전해야 했다. 그러기에 초인과 꿈과 동물이 등장하는 개국설화가 속속 유포되었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도 그래서 필요했다.

대국(大國)의 승인도 받아야 했기에 직제와 도시 계획은 중국의 예를 기본으로 해야 했다. 남은 일은 백성에게 위엄을 보이는 것이다. 건물은 좋은 수단이었다. 백성을 압도하는 크기의 궁궐이 만들어졌다. 민초들이 사는 건물의 크기는 그러기에 적극적으로 규제되었다. 도성의 얼굴 숭례문(남대문)은 들고 나는 이들에게 왕권의 절대성을 과시하기 좋은 도구였다. 가장 큰 건물이 세워졌다. 그 크기를 강조하기 위해 세종대왕은 토목공사도 병행했다. 땅을 아예 돋워 숭례문으로 들어설 때는 오르막길을 오르게 한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새로운 도전 세력이 등장했다. 일본은 이 모든 것을 부정했다.자신들에게 뒤떨어진 조선 사회를 바로잡을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일은 착착 진행되었다.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일본 황태자를 조선국으로 초청했다. 훗날의 다이쇼(大正)천황이 된 황태자는 인천항에서 일본 자본으로 부설된 경인선 철도를 이용하여 서울에 도착했다. 그런데 숭례문이 문제였다. 대 일본제국의 황태자가 숭례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성벽을 잘라내고 옆으로 길을 냈다.

도시도 개편했다. 숭례문부터 광화문 네거리를 바로 잇는 길이 생겼다. 중국의 사신이 머물던 태평관이 근처에 있었기에 이름은 태평통(太平通)이 되었다. 성곽은 틈틈이 허물어냈다. 궁궐 옆에는 더 크고 화려한 건물을 지어 초췌해진 왕조를 구석으로 밀어냈다. 경복궁에는 조선총독부청사가, 덕수궁 앞에는 경성부청사가 들어섰다. 숭례문과 맞서는 건물로 경성역도 만들어졌다. 건물의 양식은 일본식이 아니었다. 화혼양재(和魂洋才). 일본의 정신과 서양의 기술이 조합되었다고 주장했다. 일본이 아닌 ‘진보된 사회’가 통치함을 이야기하려니 공공건물은 서양의 건축 양식을 적당히 버무려 만들었다. 그렇게 도시와 건축은 지배 세력의 논리를 따라 차곡차곡 변해왔다.

세상이 다시 바뀌었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시민의 시대가 왔다. 그러나 진정한 시민의 시대는 아니었다. 새로운 쿠테타로 집권한 세력은 초인이 아닌 국가와 민족이 부르더라고 이야기했다. 중국이 아닌 미국의 승인이 필요했다. 미국 대통령의 방한은 그 승인의 절대적 증거였다. 태평로에서는 환영퍼레이드도 벌어졌다. 방송되는 텔레비전 화면을 보고서야 빠진 것들이 생각났다. 화려한 건물들이 필요했다. 태평로의 도심 재개발이 시작되었다.

재개발을 하는데 크고 화려한 건물은 중요했지만 오래된 건물은 중요하지 않았다. 법규와 자본이 허용하는 한 가장 큰 건물을 지었다. 숭례문 주위로는 덩치 큰 건물들이 대강 던져 뿌려놓은 듯 들어섰고 화려한 퍼레이드가 텔레비전 화면을 장식했다. 세종대왕의 뜻은 중요하지 않았고 세종대왕이 그려진 지폐가 중요했다. 숭례문은 파루종 소리 대신 자동차 경적 소리를 피곤하게 들으며 사진 속의 소품으로 밀려났다.

숭례문에서 시청에 이르는 태평로2가는 책의 양쪽 페이지. 왼쪽 페이지에는 재개발 후가, 오른쪽 페이지에는 재개발 전이 서술되어 있다. 왼쪽 페이지의 삼성생명빌딩, 삼성본관, 태평로빌딩은 외국에 나갈 관광 사진에 항상 등장하는 모델들이다. 신한은행사옥도 어색하게 끼어든다. 검붉은 화강석 옷을 입은 삼성생명빌딩은 유독 몸을 비튼 채 자세를 잡고 있다. 태평로의 옆 건물들도, 길 건너의 건물들도 모두 길에 나란히 서 있겠다는데 혼자만 숭례문을 바라보겠다고 하고 있다. 숭례문에서 한 켜 뒤로 물러난 건물이 이상한 자세로 서있으니 그 큰 몸집은 더 눈에 띄고 숭례문은 더 쪼그라들어 보인다.

왼쪽 페이지에는 최근에 새로운 그림이 그려졌다. 거리에 소공원, 분수, 이벤트광장이 마련되었다. 시민을 위해 열린 공간이 제공된 것이다. 지하의 삼성플라자에서는 영화도 상영하고 피자도 판다. 재벌그룹이 시민을 위해 가치 있는 작업을 할 수 있음을 거리를 통해 보여준 새로운 시도다. 로댕갤러리도 들어섰다. 훌륭한 작품이라면 단 두 개의 조각을 위해서 건물도 새로 지을 수 있다는 참신한 의지가 드러났다. 세계의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꼼꼼히 만든 유리 건물이 로댕을 감싸고 있다.

건너편 오른쪽 페이지의 오밀조밀한 건물에는 자본의 힘으로 꺾을 수 없는 고집이 뭉쳐있다. 남대문의 수난이 시작될 무렵, 성곽을 허물려니 돌을 실어 나를 노동력이 필요했다. ‘쿠리(苦力)’라고 불리던 인건비 싼 중국인들이 화려하던 시대를 잊고 등짐을 지겠다고 들어왔다. 북창동 언저리는 이들의 동네가 되었다. 그들은 사라졌어도 이 곳을 떠나지 않겠다는 고집은 계승되었다. 오른쪽 페이지는 그렇게 유지되고 있다.

결국은 오른쪽 페이지도 재개발이 될 것이다. 그러나 뒷거리는 살아 남아야 한다. 퇴근 후 시민의 생활을 도심에서 담아내지 못하면 그 도시는 죽은 도시다. 서울 중국음식점의 군만두 맛이 왜 집집마다 똑같냐고 묻지 마라. 장안 중국음식점의 재료를 책임 공급하는 거리가 여기다. 단란주점과 한식집이 많아졌어도 중국음식점은 아직 곳곳에 남아있다. 음식을 주문하면 춘장과 ‘다꾸앙’과 깍두기가 함께 나오는 거리. 20세기에 새로 펼쳐진 페이지, 태평로에는 그렇게 세 가지 언어로 된 이야기가 쓰여있다.

서현<건축가>hyun1029@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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