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에세이/21세기 앞에서]개를 기르는 마음

  • 입력 1997년 8월 26일 19시 49분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1취(趣) 1예(藝)」는 있어야 삶의 질이 윤택해진다고 얘기하면서 애견을 키워보라고 권한다. 사실 젊은 시절 정력적으로 일하던 사람이 은퇴한 다음에 정신적 허탈감에 빠지는 것은 은퇴 후에 즐길 수 있는 자기만의 세계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6.25전쟁이 막 끝났을 무렵 부친의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건너가 거기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혼자 있다보니 개가 좋은 친구가 됐고 사람과 동물간에도 심적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 동물과 마음의 대화를 ▼ 그후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귀국했는데 당시에는 반일(反日)분위기가 매우 팽배해서 일본에서 갓 돌아온 나는 학교생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개를 더욱 가까이 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항상 애견을 길러왔다. 20 몇년 전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진도개가 천연기념물 53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세계견종협회에서는 진도개의 원산지가 한국임을 증명해 주지 않았다. 요구조건이 까다롭기도 했지만 확실한 순종(純種)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사실을 알고는 곧바로 진도에 가서 사흘을 머물며 장터에도 가고 또 순종이 있다는 이 집 저 집을 찾아 30마리를 사왔다. 그리고 사육사와 하루종일 같이 연구하고, 외국의 전문가를 수소문해서 조언을 받아가며 순종을 만들어내려고 애썼다. 처음 들여온 30마리가 1백50마리로 늘어날 때쯤 순종 한 쌍이 탄생했고, 마침내 79년 세계견종협회에 진도개를 데리고 가서 한국이 원산지임을 등록시킬 수 있었다. 나는 아무리 취미생활이라도 즐기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깊이 연구해서 자기의 특기로 만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취미를 통해서 남을 도와줄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일일 것이다. 지금 아이들을 보면 보호받는 데만 익숙해 있지, 남을 보호하거나 남에게 베풀 줄은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어린이들이 애견이든 새든 동물과 교류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동물을 키우다보면 말 못하는 동물의 심리를 읽어야 하기 때문에 남을 생각하는 것이 저절로 몸에 밴다. 또 어미로부터 새끼를 받아내고 키우는 과정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내년 어린이날에는 몇 만원씩 한다는 외제 장난감을 사주기보다 강아지 한 마리, 새 한 쌍을 선물하면 어떨까. ▼ 어린이날 강아지 선물 ▼ 지난 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유럽 언론들이 한국을 「개를 잡아먹는 야만국」으로 소개한 적이 있었다. 그 보도가 나가자마자 영국 동물보호협회가 대규모의 항의시위를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한국상품의 불매운동으로까지 번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민끝에 그 동물보호협회 회원들을 서울로 초청했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개를 기르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고 애완견 연구센터, 맹도견(盲導犬)학교 등 우리나라의 애견문화 수준이 녹록치 않음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인지 다행히 시위계획이 취소되었고 더 이상의 항의도 없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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