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57>

  • 입력 2009년 8월 12일 14시 19분


"지금 뭣하시는 겁니까?"

석범이 말머리를 돌렸다. 곧장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변두리로 돌 필요도 있다.

"보면 모르겠소이까? 글라슈트를 정비 중입니다."

"정비는 이미 끝난 것 아닙니까? 세워두기만 할 건데 따로 안을 살필 이유가 있습니까?"

민선은 분명히 배터리를 뽑고 겉모습만 전시한다고 찰스에게 답했다. 볼테르는 다시 침묵하며 글라슈트의 등을 살피느라 바빴다.

"W가 과연 놀라운 무술이긴 합니다. 사나운 격투 로봇들을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하게 제압하지 않았습니까? 이 모두가 서사라 트레이너의 공이겠지요?"

석범은 다시 사라의 이름을 들먹였다. 이번에도 볼테르는 입을 열지 않았다. 글라슈트의 손가락들이 차례대로 숫자를 세듯 접혔다.

"글라슈트를 작동시키지 않는다고……."

"그만 내려가시오. 글라슈트는 내 로봇입니다. 작동을 하든 말든 내 마음입니다. 전시를 할 때는 찰스 사장이 원하는 대로 배터리를 끄겠지만, 지금은 내 뜻대로 하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말투에서 칼날이 번뜩였다. 찰스 사장이 글라슈트를 탐낸다는 풍문이 헛소문만은 아닌 듯했다.

로봇을 광대처럼 이런 곳에서 전시하는 일도 마음에 내키지 않겠지. 서사라를 찾는 것이 급한데, 우승 축하연이라니. 여기까지 오는 동안 도움 한 번 주지 않는 자들이 모여 시시덕거리는 파티에 글라슈트를 데려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럽다고 여길 지도 몰라. 하지만 배틀원 대회가 2049년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2050년 2051년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선 든든한 후원자를 찾는 게 중요해. 엄청난 행운을 눈앞에 두었는데, 이런 짜증도 어쩌면 사치겠지.

석범은 벽에 기댄 채 볼테르의 손놀림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한 마디만 덧붙였다간 강제로 1층까지 떠밀려 내려갈 분위기였다.

처음에는 마구잡이로 양손이 노는 줄 알았는데, 10분 쯤 지켜보고 있으니 어떤 흐름이 잡혔다. 볼테르의 양손은 글라슈트의 엉덩이에서부터 등줄기를 따라 위로 올라갔다. 가끔 다시 아래로 내려와서 원을 그리거나 삼각형, 사각형, 나아가서 별모양으로 손이 놀기도 했지만, 다양한 도형을 그린 후엔 다시 처음 내려왔던 지점보다 조금 더 위로 손을 올렸다.

볼테르는 1센티미터 씩 올라갈 때마다 양손을 글라슈트의 등에 댄 채 고개를 들고 눈을 감았다. 방금 살핀 부위와 기억 속 부위를 비교하는 눈치였다. 민선이라면 설계도를 허공에 띄워놓았겠지만 자칭 천재 볼테르는 홀로그램 설계도보다 자신의 뇌를 더 믿었다.

고개를 끄덕인 다음 다시 시선을 높여나갔다.

"이상한데……."

한 지점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턱을 들고 한참 눈을 감았다가 다시 양손을 엇갈리게 놀리며 하나하나 짚어나가기도 하고, 다시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내쉬었다가 선들을 일일이 세기도 했다. 그리고 석범을 불렀다.

"이리 좀 와 보세요."

"나 말입니까?"

"지금 2층에 은 검사님과 나 두 사람 외에 누가 더 있습니까?"

"방해하지 않으려고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만……."

석범이 반벙어리 흉내가 억울한 듯 한 마디 툭 던졌다. 볼테르는 그 말을 무시한 채 바로 용건을 꺼냈다.

"글라슈트 곁에 잠시만 머물러 주십시오. 차에 가서 부품 하나만 챙겨 오겠습니다."

"부품이라고요?"

"네, 10분 아니 5분이면 됩니다."

"그럼 작동을 멈추고 다녀오는 게……."

"그게 안 되니까 부탁드리는 것 아닙니까? 거의 다 되었습니다. 곧 글라슈트의 이상행동 원인을 밝힐 수 있습니다."

"이상행동……! 알겠습니다. 내가 지키겠습니다."

석범이 응낙하자마자 볼테르가 황급히 계단으로 향했다.

글라슈트의 난폭성에 대해서는 지금도 계속 뉴스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무리 격투 로봇이라고 해도 상대 로봇을 완전히 박살내는 데까진 이르지 않는다. '죽음신호'가 나면 즉시 멈추기 때문이다. 그런데 글라슈트는 상대로봇의 '죽음신호'를 감지하고서도 치명적인 공격을 이었다. 그마저 프로그래밍된 것일까. 최 볼테르의 분노를 닮았을까.

그 순간 갑자기 글라슈트가 눈을 번쩍 떴다.

석범을 향해 곧장 걸어오기 시작했다.

걸음걸음 살기(殺氣)가 넘쳤다.

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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