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20>

  • 입력 2009년 6월 22일 14시 09분


'가족은 무조건 내 편이다'만큼 벼린 문장은 찾기 힘들다. 가족은 내 편이어야 한다는 바람이기도 하고, 내 편이 아니면 가족이 아니라는 협박이기도 하다.

"아, 아니에요."

미미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그래? 왜? 내가 최 간호사를 지금 죽이지 않아서……?"

"……그냥요."

너무 놀란 미미가 모기만한 소리로 겨우 답했다.

"그냥이라! 좋은 말이군. 그래 그럼, 계속 '그냥' 근무하도록 해. 내가 연쇄살인마란 확신이 들면 그땐 이딴 사직서 내지 말고 '그냥' 도망부터 치라고. 알겠지? 꼭 그렇게 해."

노 원장이 사직서를 반으로 찢고 반으로 찢고 또 반으로 찢었다.

병원을 떠나기 전, 24시간 내내 영업하는 종로 9가 횟집에 예약을 확인했다. 오늘은 죽은 아내의 생일이었다. 딸에게 함께 식사를 하자고 연락을 넣었지만, '배틀원 2049' 때문에 바쁘다는 짧은 답만 날아들었다. 4강전이 열리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음성을 남겼다.

"꼭 만났으면 좋겠구나. 네 엄마도 우리가 마주 앉아 밥 먹기를 바랄 게야. 경기장으로 가서 기다리마."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도 혹시 기회가 있으면 딸에게 말을 걸 작정이었다. 벌레보다 못한 인간이라며 욕설을 퍼붓더라도 이번엔 묵묵히 참기로 결심하고 또 결심했다.

자동차에 오르자마자 비가 쏟아졌다.

단 1초의 오차도 없었다.

특별시 기상청은 가뭄이나 기타 이유로 인공 강우나 강설을 결정했다. 오늘도 짧은 가뭄을 해갈하기 위해 20분 남짓 비를 뿌릴 예정이었다. 스마트 카폰이 깜박였다. 보안청 은석범 검사였다. 잠시 그 푸른 직사각형을 쳐다보다가 '연결!'이라고 말했다.

"노윤상입니다."

"보내드린 자료는 검토하셨는지요?"

"덕분에, 잘 보았소이다."

"저는 지금 배틀원 2049 경기장에 와 있습니다. 방문종까지 죽었으니 이제 앵거 클리닉 환자 중에서 생존자는 최 볼테르 교수뿐입니다. 원장님! 한시라도 빨리 뵙고 의견을 나누었으면 합니다만……."

노 원장은 잠시 답을 하지 않았다.

"원장님! 다음 희생자가 생기기 전에 범인을 잡아야 합니다. 잠깐만 시간을 내주십시오."

"알겠소이다. 그럼 상암동 경기장에서 잠시 봅시다."

"도착하시면 바로 연락 주십시오."

노 원장은 수동운전을 택했다.

비 내리는 거리를 직접 운전한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병원 가까운 곳으로 이사한 5년 전부터는 특별한 일이 아니고는 자동차를 타지 않았다. 시내 중심가로 갈 때도 자동운전을 택한 뒤 책을 읽거나 환자들과의 면담기록을 체크하거나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새로 살 책에 씌울 표지를 만들었다. 오늘은 직접 운전하기로 했다.

라이프로그에 저장해둔 20년 전 동영상을 불러냈다. 화면 속에서 양 갈래 머리를 땋고 차에 오른 민선을 화면 밖으로 끄집어내어 옆자리에 앉혔다. '그리운 이와의 대화'라는 치료용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작동시킨 것이다. 미리 입력한 자료를 바탕으로 대답하고 행동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아빠! 달려요."

민선은 어려서부터 자동차 타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시동을 걸면 전속력으로 달리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자동운전은 제한 속도를 엄격하게 지키기 때문에, 무거운 벌금을 각오하고서 수동운전을 택해 질주하곤 했다.

"그래보자꾸나."

노 원장은 손을 뻗어 어린 민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물론 아무 것도 닿지 않았지만, 민선은 그의 손짓을 센서로 파악하고 답했다.

"아빠! 나 이뻐?"

"그럼, 이쁘고 말고! 이 세상에서 가장 이쁘단다."

"헌데 엄마는 어딨어? 우리랑 같이 안 가?"

민선이 자동차 뒷좌석을 흘끔 돌아보며 물었다.

질주하는 자동차에서 민선은 꼭 이렇게 세 번 네 번 묻곤 했다. 엄마는요? 엄마는 왜 우리랑 같이 안 가요?

그때마다 그는 똑같이 답했다.

"엄만 잠꾸러기란다. 우리가 신나게 놀고 와도 쿨쿨 잠들어 있을 걸. 다녀와서 엄마에게 오늘 본 것들을 말씀드리렴."

어린 민선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빤 왜 자꾸 거짓말만 해? 미워.

꼭 이렇게 토라질 것만 같았다. 그는 늘 두려웠다. 언젠가는 사실을 말해야 하겠지만, 그 날이 되도록이면 먼 미래이기를 바랐다.

"알았어요. 아빠, 달려요!"

어린 민선은 고사리 손으로 제 무릎을 작은 북을 치듯 두드려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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