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339)

  • 입력 2000년 2월 1일 19시 21분


전신의 상처를 드러내놓고 있는 내 나라

나는 파시스트와 부르조아를 증오하는 거야.

네 아버지가 그래?

그는 긴 세월 동안 독재에 봉사한 집권당 국회의원이었어. 잘 알잖아?

나는 이제사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는데.

라고 말하면서 나는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그의 증오와 나의 이해는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게 되어 버렸다구요. 출발점은 하늘과 땅처럼 달랐는데.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어요.

세상 도처에 저렇게 많은 그저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이제부터 누가 보호하게 될까.

보호가 싫다구 오히려 옛날루 돌아가자구 한 게 아닌가? 시장이 저들을 삼켜버릴테지.

물론 경쟁은 나빠. 하지만 통제두 그에 못지 않게 나빠.

지상에 없는 것을 생각하지 말자구.

우리는 며칠 사이에 생활이 되어버린 여행으로 되돌아갔어요. 그렇지만 여행은 또 얼마나 아무런 책임도 없는 것인지. 그냥 바람처럼 대지와 사람들의 집 동네 사이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거든요. 그렇지만 그 길은 대륙을 건너 점점 나의 울타리 가까이로 접근해 가는 행로였지요. 허리가 잘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꿈을 위해서 자신의 일생을 바치고 이제는 엄청난 변화에도 무심하게 전신의 상처를 드러내놓고 있는 내 나라에 말예요.

바이칼을 넘어서 동시베리아 쪽으로 들어서자 대평원 멀리 산맥이 나타나고 길게 뻗은 강이며 언덕들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타이가의 침엽수림이 울창하게 덮인 산이 연이어졌습니다. 품위있는 갈색의 낙엽송이며 가문비나무 삼나무 그리고 세상의 자작나무는 모두 이 고장에 모여 있다는 듯이 끝도 없이 철도를 따라오고 있었어요. 대륙의 젖줄인 아무르 강의 흐름을 따라서 횡단열차는 떠오르는 해를 받으며 달리고 황혼 무렵이면 기차의 꽁무니 쪽으로 해가 사라져 갔어요. 이틀 밤낮을 달려서 하바로프스크에 이르기 전날 밤에 영태와 나는 이제는 차를 타는 일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싫증이 났어요. 우리는 잠들기 전에 조금씩 마시던 보드카를 권커니 잣커니 했지요. 처음에는 그저 취기가 약간 오르는 듯했는데 토냐 때문에 발동이 걸려 버렸어요. 그네가 독일에서도 우리가 김치 대신 먹던 것과 비슷한 러시아 양배추 절임과 돼지고기를 가져왔기 때문이었어요. 전날 내가 스타킹을 주었거든요. 우리는 신나게 마셔댔어요. 밤 바람이 제법 차가웠는데도 우리는 창문을 열었지요. 싱그런 나무 냄새와 그야말로 강의 물비린내가 향긋하게 불어들어왔어요. 우리는 서로 제각기 떠들며 노래하고 지껄이고 토냐는 근무 중이라 몇 잔 걸치고는 가버렸구요. 송영태와 나는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입술이 풀릴 만큼은 되었던 것 같아요. 언제부턴가 두사람은 차츰 가라앉기 시작하더니 보통때처럼 각자 침묵에 빠져 버렸습니다.

너 왜 찔찔 짜냐?

영태가 손가락질을 하면서 물을 때에야 나는 창 밖의 어둠 속을 내다보다 눈물이 났다는 걸 알았죠. 이 선생이 여기 이 자리에 있었으면 싶었습니다. 그건 살아있는 당신의 부재와는 전혀 다른 무엇이었거든요. 나는 말해버렸어요.

이 선생 생각나서.

개인주의자….

이봐 난 개인주의자 아냐.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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