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남성중심 사회에 통쾌한 한방 날린 스타작가 양귀자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1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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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베스트셀러]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양귀자 지음/368쪽·1만5000원·쓰다

조해진 소설가
조해진 소설가
1990년대 한국소설의 산맥 하나는 양귀자 작가의 몫이었다. 1986년에 출간한 ‘원미동 사람들’부터 심상치 않은 반향을 일으키더니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2년) ‘천년의 사랑’(1995년) ‘모순’(1998년) 등이 연달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렇다고 양귀자의 저력이 ‘잘 팔리는’ 것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그의 평판작이자 지금까지도 사랑을 받고 있는 ‘원미동 사람들’은 1980년대 서민들의 다양한 자화상을 그려낸 수작이다. 단편소설 ‘숨은 꽃’과 ‘곰 이야기’는 오랜 전통의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나는 소망한다…’는 1994년 영화로도 제작됐다. 동명 영화는 한때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누비던 독보적인 스타였지만 지금은 대다수 한국인에게 아픈 이름으로 기억되는 고(故) 최진실 배우가 주인공 ‘강민주’ 역으로 등장한다. 남성에게 사랑받기를 거부했던 차갑고 이지적인 강민주는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며 앙증맞게 웃는 새댁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기에, 당시 영화는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걸로 기억한다.

소설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을 경험했고 현재는 여성문제상담소에서 일하는 민주가 여성을 향한 차별과 폭력이 난무한 사회에 복수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민주는 개인적 상처를 사회적인 문제로 확대해 여성의 권리를 재고하게 하려 했던 셈이다. 문제는 복수의 방식인데, 바로 백승하라는 배우를 납치한 뒤 언론이 그의 실체를 파헤치도록 유도했다.(유튜브 등이 없던 시절이었기에 이 간접적인 폭로가 최선이었을 것이다) 민주가 생각하는 백승하의 죄는 매력적인 외모로 여성들이 성차별적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환상에 빠져들게 했다는 것이었다.

소설이 출간된 1992년은 가정폭력 및 성폭력의 처벌과 피해자 보호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다. 일상에서도 여성 차별에 대한 인식이 현저히 낮았다. 1982년에 태어난 열한 살의 ‘김지영’들은 남성 형제에게 무조건 양보해야 하고 싫어하는 남학생에게도 친절해야 한다는 걸 학교와 가정에서 부지런히 체득하고 있던 당시에 강민주는 페미니즘 전사였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무리 대의가 분명하더라도 무고한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윤리적인가에 대한 의문 제기나 소설의 결말이 다소 교과서적이라는 비판은 가능할지 몰라도, 여성혐오니 미러링이니 하는 용어조차 없던 20여 년 전이란 걸 감안하면 강민주가 시대를 앞서 탄생한 캐릭터라는 건 분명하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불거진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은 지금 이 시대 가장 뜨거운 이슈다. 다시 25년쯤 흐르면 그때 사람들이 지금의 ‘82년생 김지영’을 어떻게 바라볼지 자못 궁금해진다.

조해진 소설가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양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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