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서럽다]<1>운전대 잡기 겁나요

  • 입력 2004년 6월 3일 17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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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제17대 총선을 통해 39명(전체의 13%)의 여성 국회의원이 국회의사당에 입성한 것을 보면 좀처럼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금녀의 벽이 하나 둘 사라지는 것을 실감한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변화가 가장 빠르다는 한국사회에서도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다. 여성 운전자와 여성 흡연자가 넘쳐나고 있으나 아직까지 “어디 여자가…”라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이조여인잔혹사’란 옛날 영화가 있었지만 최근 ‘흡연여성잔혹사’란 책이 화제인 것을 보면 여성에 대한 편견은 21세기에도 여전한 양상이다. 사회적 금기를 깨긴 했지만 아직도 자유롭지 못한 각종 여성 문제를 본사 사외기자와 함께 짚어본다.》

가족과 함께 태국에서 5년간 살다 2002년 초 귀국한 주부 김현숙씨(38·대전 서구 만년동)는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맹수가 우글거리는 정글에 들어가는 전사 같은 기분을 느낀다.

한적한 외국 생활에 익숙한 터라 ‘현기증 나는’ 서울 대신 여유로운 대전을 택한 김씨는 이삿짐을 풀자마자 아이들 통학 때문에 차를 구입했다.

‘지방도시여서 운전하기에 좋을 것’이라는 생각과 현실은 너무나 달랐다.

“앞차가 머뭇거릴 때 ‘노인 아니면 아줌마’라는 비아냥은 보통이죠. 앞차 운전자가 남자라면 그냥 지나칠 일도 여자임을 확인한 순간 차를 바싹 붙여가며 경적을 울리는 것은 점잖은 편이고, 삿대질에 욕설, 차 앞에 확 끼어들어 깜짝 놀라게 만드는 ‘보복’도 숱하게 당했죠.”

운전대만 잡으면 ‘야수’로 돌변하는 남성 운전자들의 거친 운전에 김씨는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 봤다.

“더운 날 차창을 열고 운전하는데 옆 차로의 남자 운전자가 던진 담배꽁초가 차 안으로 날아 들어와 놀라는 바람에 사고를 낼 뻔했어요. 어떤 날은 1차로를 달리는 내 차를 2차로에서 달리던 버스 운전사가 ‘덩치’로 밀어붙이는데 밀리다 보니 결국 내 차는 중앙선을 넘어가더군요.”

몇 년간 번잡한 서울 도로에서 ‘내공’이 쌓여 “어지간한 일에는 끄덕도 안 한다”는 이희영씨(42·서울 노원구 중계동)도 지난달 집 근처 쇼핑센터 주차장에서 겪은 일만큼은 화가 났다.

“붐비는 주차장에서 겨우 빈자리를 찾아 후진주차하려는 순간 뒤에서 오던 남자 운전자가 운전 실력을 과시하듯 단숨에 그 자리에 자기 차를 쏙 넣고 가버리는데 열이 확 오르더군요.”

여성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지고 택시나 버스를 운전하는 여성들도 늘고 있지만 도로에서 겪는 일반 여성 운전자의 어려움은 여전하다. 경찰청에 따르면 여성 운전자는 2003년 말 현재 795만명으로 전체의 36%를 차지한다. 1993년 20.8%였던 것과 비교하면 10년 사이에 2배 가까이로 늘어난 셈이다.

최근 운전 관련 인터넷사이트도 많아지면서 이들 사이트의 게시판에는 ‘공포의 하얀 장갑’ ‘솥뚜껑 운전사’로 매도되는 여성 운전자들의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주로 남성 운전자에게 당하는 욕설과 위협운전에 대한 불만이다.

물론 여성 운전자가 순발력이 부족하고 운전이 미숙해 차로 변경시 막무가내로 차를 밀고 들어온다는 남성 운전자들의 불평과 반론도 있다.

여성들은 아버지나 남편에게 받는 ‘과보호’ 때문에 남성보다 ‘장롱면허’가 많은 게 현실이다. 주부 중 많은 수가 남편의 허락 없이는 운전할 꿈도 못 꾼다.

하지만 여성 운전자들이 도로에서 ‘치이는’ 현실은 여성의 운전능력보다도 한국의 후진적인 교통문화 때문이란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시민단체인 교통문화운동본부(대표 박용훈)가 지난해 실시한 ‘한국의 자동차문화 평가’에 따르면 운전자 의식, 도로환경, 자동차 보유수준 등 7개 항목을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와 비교할 때 한국의 자동차문화 지수는 78.9점으로 나타났다. 이는 일본(160.7) 스웨덴(132.7) 네덜란드(124.9) 등 선진국에 비해 크게 낮은 수준이다.

과거 초보 운전자를 보호하기 위해 법으로 초보운전 표시를 의무화했으나 이 표시로 인해 오히려 초보 운전자가 골탕을 먹는 바람에 폐지된 것도 우리의 도로문화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운전학원 여성강사인 유정숙씨(47·울산 남구 삼산동)는 “전반적으로 여성이 남성에 비해 속도에 대한 두려움이 많고 순간판단력이 늦지만 충분한 연습을 하고 운전경험만 쌓으면 남성 운전자 못지않게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여성 운전자가 안전에서 남성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은 교통사고 통계에서도 입증된다. 도로교통안전관리공단의 통계에 따르면 2002년 발생한 23만953건의 교통사고 가운데 여성 운전자의 교통사고는 2만8924건으로 전체 교통사고의 12.5%에 불과하다. 교통사고 사망자 통계에서도 여성 운전자는 전체 사망자의 7.9%에 그치고 있다.

자동차10년타기시민운동연합의 임기상 대표는 “남성은 ‘기득권’ 논리를 바탕으로 도로를 지배함으로써 득을 보는 ‘공격형 운전’을 하는 반면 여성 운전자는 ‘수비형 운전’을 함으로써 손해를 보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임 대표는 “궁극적으로는 남성도 여성처럼 수비형 운전으로 습관을 바꿔 양보운전이 운전자 모두에게 득이 되는 선진형 운전문화를 정착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일본의 여성 카레이서가 쓴 ‘운전기술 여성의, 여성을 위한’의 번역서를 내기도 했다.

박경아 사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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