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땅 우리 魂 영토분쟁 현장…]<5>사이섬 비석의 슬픈 운명

입력 2004-05-06 19:06수정 2009-10-09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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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평한 돌 위에 한때 무엇인가가 서 있었던 흔적이 선명했다. 칼로 도려낸 듯 그 자리만 흉물스레 허연 속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왜 잔해를 치우지 않은 것일까. 무엇을 경고하려는 뜻일까. 가까이에 있는 집 대문을 두드려 그 까닭을 물었다. 집 주인인 듯한 중년의 조선족 남자는 “한국서 오셨소?”라고 되물은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도 잘 모르오. 한국 사람들이 자꾸 와서 비석을 들여다보면서 ‘간도는 원래 우리 땅’이라고 하니까 당국에서…”》

●‘元祖 간도’의 사라진 비석

중국 지린(吉林)성 투먼(圖們)시와 룽징(龍井)시 사이의 두만강 어귀에 촨커우(船口)촌이라는 곳이 있다. ‘배 닿는 곳’이라는 뜻의 이 마을은 지금도 여름철 두만강이 범람할 때면 마을 앞 습지가 쪽배 하나 다닐 정도의 샛강으로 변한다. 그 건너편은 북한의 종성.

이 마을 옆 습지에 한글로 ‘사이섬’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건립된 것은 2002년이었다. ‘사이섬’은 간도의 우리말. 옌볜(延邊) 지역을 방문하는 한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세운 것이었다. 그만큼 촨커우촌 사람들에게는 ‘우리 마을이 원조 간도’라는 자부심이 강하다.

“1882년 청나라가 간도 주민을 청에 편입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제일 문제시했던 곳이 바로 여기였습니다. 이곳으로 넘어온 조선 사람들이 서쪽으로 퍼져가며 룽징시도 만들고 했으니까요.” 현지 역사학자 A씨의 증언이다.

●개척기 정서가 남아 있는 간도

‘월편에 나붓기는 갈대잎가지는/애타게 내 가슴을 불러야보건만/이 몸이 건느면 월강죄란다./기러기 갈 때마다/일러야 보내며/꿈길에 그대와는 늘 같이 다녀도/이 몸이 건느면 월강죄란다.’ 사라진 비석 뒷면에 새겨진 노래로 간도 개척기 조선인 이주민들의 정서가 그대로 담겨 있다.

19세기 말 촨커우촌 일대는 여전히 국경을 넘는 것이 금지돼 있었지만 기름진 땅을 찾아 이주해 오는 조선인들이 급증했다. 감시와 단속을 피하기 위해 주로 밤에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들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 물물교환이 이뤄지는 저자도 생겨 제법 흥청거리기도 했다.

●금지된 단어가 돼버린 ‘간도’


옌볜지역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세워졌던 투먼시 촨커우마을의 사이섬 비(왼쪽). 뒷면에는 새 삶을 찾아 두만강을 건넜던 조선인들 사이에 구전된 애달픈 노랫말, ‘이 몸이 건너면 월강죄라네’가 새겨졌다. 그러나 비석은 세워진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당국에 의해 철거됐다. -사진제공 백두문화연구소·백두산=특별취재팀

선조들의 간도개척사를 관광상품으로 만들려던 조선족들의 궁리는 참담한 결과를 맞았다. 채 1년도 되지 않아 비석이 강제 철거된 것. 누가 왜 철거했는지 공식적으로 경위를 확인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마을사람 누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마을사람들의 자문에 응해줬다는 현지 학자들을 수소문해 찾아가서 사건의 전말을 물어봐도 한결같이 “모르는 일”이라거나 “정치적인 문제”라며 입을 닫았다.

간도는 이제 조선족에겐 금지된 단어가 된 것이다. 비석을 철거하고도 흉하게 잔해를 남겨둔 것은 금기를 어기면 어떤 징벌을 받을 수 있는지를 냉엄하게 학습시키는 본보기였다.

●역사적으로 實在하는 간도

간도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한 사람은 1902년 조선정부의 간도시찰사로 임명돼 이 지역을 둘러봤던 이범윤(李範允)으로 알려져 있다. 이범윤은 당시 이 지역의 중국측 행정책임자인 둔화(敦化)현 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간도’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1907년에 작성된 중국측 실사자료인 ‘옌지변무보고(延吉邊務報告)’는 이 지역을 ‘중저우(中洲)’로 표기하고 있다. 현재 중국의 공식적인 행정표기 어디에서도 ‘간도’는 찾아볼 수 없다.

간도의 범위는 다소 막연하다. 넓게 만주 전체를 일컬을 때도 있고, 좁게는 쑹화(松花)강 이남을 뜻할 때도 있다. 19세기 말의 사료들이 두만강 대안지역뿐만 아니라 압록강 대안지역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북간도만 간도인 것은 아니다

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들도 현재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간도’라고 지칭하는 곳은 북간도일뿐이라고 단언한다. 실제 간도는 더 넓다는 뜻이다.

“강 사이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사이섬이 생기면 다 간도라고 불렀어. (북한의) 온성 건너편이면 온성간도, 종성 건너편이면 종성간도 하는 식이지. 두만강 건너편은 북간도 또는 동간도라고 부르고 압록강 건너편은 서간도라고 불렀어.”

조선정부 역시 서간도 지역 주민까지 조선 백성이라는 의식을 분명히 갖고 있었다. 1897년 이 지역을 관할하는 서변계(西邊界) 관리사를 임명하고, 1900년 무렵엔 평북관찰사가 이 지역 주민을 보호하도록 한 것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단둥 주민도 조선이 관리했다

포항공대 박선영 교수(중국사)는 “지금의 단둥(丹東) 지역에 사는 조선인들의 호적을 조선 정부가 관리했다는 기록도 있다”며 간도문제를 서간도까지 확장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1962년 북한과 중국 사이에 체결된 것으로 알려진 중조변계조약(中朝邊界條約)은 양국의 전 경계선을 확정했다. 이 조약에 따르면 국경은 압록강-백두산-두만강이며 간도는 중국에 속한다. 이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은 유보적이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1962년 북-중 국경밀약의 내용을 알고 있으며 그 효력을 인정하는가?’라는 취재팀의 질의에 “북한과 중국이 현재까지 조약 체결을 공식 확인한 바 없고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조약내용도 확인되지 않은 것이므로 정부가 입장 표명을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답했다.

그는 “남북통일로 북한이 맺은 조약을 승계해야 할 경우에 대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라는 질의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았다.

●간도분쟁의 뿌리는 간도협약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제는 즉시 간도에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설치하고 ‘간도는 조선영토’라고 주장했다. 그러던 일제가 1909년 태도를 돌변해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고 간도를 청나라에 넘겼다.

당사자인 조선정부의 동의를 받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결국 아무 권한도 없는 일제의 만행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굴레를 씌우고 있는 것이다. 5년 뒤면 통한의 간도협약이 체결된 지 100년이 된다.

백두산=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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