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패션]‘머리부터 발끝까지’ 女心 사로잡은 디자인… 스킨케어도 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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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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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계의 거장 크리스티앙 디오르(1905∼1957=·사진)는 1905년 프랑스 노르망디의 어촌마을 그랑빌에서 비료사업을 가업으로 물려받아 유명 세척제를 개발한 아버지 모리스 디오르와 어머니 마들렌 디오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년기의 디오르는 차분한 어머니를 빼닮아 해변의 꽃과 정원을 좋아하는, 부모가 보기엔 ‘심각하고 중요한 것에는 관심이 없는 아이’였다. 그랑빌에서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카니발용 의상을 직접 디자인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번뜩이는 예술적 재능을 내비쳤지만 그 재능을 일찍 꽃피우지는 못했다. 건축학도를 꿈꿨지만 아들이 외교관이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못한 디오르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해야 했다.》

○ ‘뉴룩’, 유럽과 미국을 강타하다

디오르가 패션 디자이너로서 첫발을 내딛게 된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지고 경제공황으로 가정 형편이 궁핍해지면서부터였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까지 사망하면서 심신을 추스르려고 요양을 떠난 발레아레스 제도에서 디오르는 여성복 스케치를 시작했고 독창적이면서도 눈부신 이 스케치는 디오르를 디자이너의 삶으로 이끌었다.

1946년 당시 세계적인 직물왕이었던 마르셀 부삭을 만나면서 디오르의 삶은 커다란 전환을 맞는다. 이때부터 디오르는 ‘쿠튀르 하우스’를 열고 자신의 디자인을 대중 앞에 본격적으로 선보일 기회를 얻는다. 파리 8구 몽테뉴가 디오르 쿠튀르 하우스에서 작업한 첫 결과물이 중심이 된 그의 봄여름 컬렉션은 대중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미스 디올 셰리향수 콜렉션(위)한국에서 3분, 일본과 프랑스에서 2분마다 한 개씩 팔린다는 디올의 캡춰원 에센셜. (아래) 사진 제공 크리스티앙 디올
미스 디올 셰리향수 콜렉션(위)
한국에서 3분, 일본과 프랑스에서 2분마다 한 개씩 팔린다는 디올의 캡춰원 에센셜. (아래) 사진 제공 크리스티앙 디올
긴 치마에 잘록한 허리, 풍만한 몸선 등 지금까지 접해보지 못한 디오르의 획기적인 패션 제안 앞에 사람들은 넋을 잃었다. 이날 컬렉션 참석자들이 재떨이가 뒤집히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의 디자인에 몰입했다는 일화는 아직까지도 전설처럼 전해진다. 디오르의 패션을 ‘혁명적’이라고 평가한 하퍼스 바자의 에디터 카르멜 스노는 디오르의 디자인에서 느낀 새로움을 ‘뉴룩(new look)’이라는 단어로 묘사했다.

디오르의 뉴룩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다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무명에 가까웠던 크리스티앙 디오르라는 이름은 이제 세계인들이 열광하는 이름으로 변해 있었다. 이후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보폭은 넓어지기 시작했다. 디오르는 1947년 유년시절 그랑빌에서 우정을 나눴던 ‘절친’ 세르주 에프틀레루이슈와 함께 향수를 만드는 ‘퍼퓸 크리스티앙 디오르’를 창립했다. 18, 19세기 패션에 대한 경의를 기본으로 하는 디오르의 디자인 영역은 ‘모자부터 신발까지’라는 문구로 상징되듯이 여성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대상으로 했다.

○ 지치지 않는 열정 지닌 완벽주의자

패션계에서 디오르가 이룬 업적은 국가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정부는 1950년 크리스티앙 디오르에게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를 수여한다. 디오르의 창의력은 지칠 줄을 몰랐다. 1950년은 디오르가 무려 일곱 개의 컬렉션을 디자인해 발표한 해이기도 하다.

디오르는 “나는 타협하지 않을 때만 만족을 느낀다”며 자신이 완벽주의자임을 감추려 하지 않았을뿐더러 “10일 동안 수백 개의 드로잉을 완성한다”고 할 만큼 일에 대한 열정은 뜨거웠다. 자서전 ‘나는 쿠튀리에(패션 디자이너)입니다’가 발표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첫 립스틱이 론칭되던 해 디오르는 4000여 명의 소르본대 학생 앞에서 강의를 했다. 1957년에는 쿠튀리에로서는 세계 최초로 타임지의 커버를 장식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광의 정점에 선 그는 격무에 지친 심신을 달래려고 방문한 이탈리아 몬테카티니에서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주인을 잃은 충격에 휩싸였던 디오르 하우스는 디오르가 직접 지명한 후계자 이브 생로랑이 아티스틱 디렉터를 맡아 이끌어 가게 된다. 디오르는 가고 없지만 ‘은하수(갤럭시)’라는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쟁쟁한 디오르 하우스의 디자이너들은 향수, 스킨케어, 가방, 선글라스, 신발, 시계 등 패션의 모든 분야에서 젊음과 미를 갈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디오르 하우스의 자산을 끝없이 창조해냈다.

1 ‘포레스트 버드 부티크’ 내부
2 오줌 누는 소년이 그려있는 ‘동키 프로덕츠’ 유리컵
3 ‘10 챈서리 레인 갤러리’ 내부
4 프랑스 화가 에르베 모리 씨의 고양이 그림
5 케네스 렁 씨가 찍은 홍콩 란콰이펑 풍경
6 하트 모양의 ‘드래건-i’ 선글라스
7 ‘브러더&시스터 콘셉트 스토어 앤드 카페’
8 ‘1881 헤리티지’ 쇼핑몰
○ 패션과 미(美)의 아이콘이 되다

스킨케어 한 분야만 살펴봐도 디오르의 브랜드 파워는 막강하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수분 케어’가 스킨케어의 독립영역으로 자리잡은 것도 1973년 디오르가 첫 스킨케어 라인 ‘이드라 디올’을 출시한 것이 계기가 됐다. 올해 선보인 디올 ‘캡처 원 에센셜’은 노화와의 싸움이라는 인류의 영원한 숙제에 대해 디올 하우스가 피부 과학과 혁신적인 기술을 결집해 내놓은 답변이다. 1986년부터 선보이기 시작한 디올의 안티에이징 에센스의 노하우가 모두 담겨 있다는 평가를 받는 제품으로, 한국에서는 3분마다 1개씩, 일본과 프랑스에서는 각각 2분마다 1개씩 판매된다고 전해진다.

크리스티앙 디오르 탄생 100주년인 2005년 프랑스 문화부는 국가적인 기념행사를 열었다. 디오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그랑빌에서는 회고전이 열렸다. 퍼퓸 크리스티앙 디올은 야생 스트로베리 소르베와 카라멜 팝콘 향을 가미한 향수 ‘미스 디올 셰리’를 선보여, 20년 전 출시된 향수 ‘미스 디올’에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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