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은의 이야기가 있는 요리]퓨전 떡국, 와인과도 어울려

  • 입력 2003년 1월 2일 17시 23분


코멘트
“아줌마, 암표 있어요?”

“이 학생 오늘 재수 좋네. 시방 딱 두 장 남았거든….”

암표 사고 남은 동전까지 박박 긁어서 손에 쥐는 넓직한 오징어구이의 흐뭇한 온기. 20년 전 극장 앞은 이랬다. 벼르고 별러서 날을 잡고, 설레는 마음으로 주머니 속의 영화표를 몇 번이나 만지작거리고, 씹는 맛이 죽이는 오징어냐, 배도 부르고 달큰한 군밤이냐를 놓고 주머니 속에 남은 잔돈을 헤아리던 일련의 모든 과정이 ‘영화 관람’이란 하나의 ‘이벤트’였더랬다. 요즘에야 DVD, 온라인 시네마, 멀티플랙스 등 눈 한번 깜짝이면 내 눈 앞에 영상이 넘쳐나는 시대가 되었지만 말이다. 턱없이 초라한 화면에, 기발하지 않은 스토리 라인이었더라도 순정영화에는 울고, 에로영화에는 떨며 촉촉히 지나간 70, 80년대는 우리 모두가 참 순진했었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그때가 바로 순수의 시대였던가?

● 순수의 시대 끝나다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흑백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내게는 학생시절을 보낸 뉴욕이 그리워지면 들춰 보게 되는 앨범 같은 영화다. 특히나 나를 사로잡는 ‘할리’라는 캐릭터(헵번분)는 누구에게도 속하고 싶지 않고, 누구도 소유하고 싶지 않은 자유인이라고 자신을 말하며 곁에 기르는 고양이조차 정이 붙어 서로 연연하게 될까봐 이름을 붙여주질 않는다고 얘기한다.

원본 필름을 처음 관람한 열아홉 시절에 그녀의 그 대사가 당시 나의 인생관과 토씨 하나 안 빼고 똑같았기에 ‘할리’라는 캐릭터는 그날로부터 나의 친구가 되었다. 자유인? 그렇다. 필자의 지난 10여년은 자유인이고 싶은 꿈과 욕망의 시간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정신없이 살아 오면서도 무엇 하나 정착을 위한 준비는 없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훌쩍 떠날 수 있는 자유인이기 위해 걸리적거릴 모든 것들, 예컨대 차는 물론이고 가정을 갖는 일이라든가 할부로 큰 물건을 구입하는 것 등은 철저히 배제된 삶이었다. 그저 순간순간 일하고, 누군가를 심플하게 만나고, 웃고 마시고 소비하는 시간이 3년이나 흐른 뒤 네번째의 새해를 맞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문득, 훌쩍 떠나도 그것은 단지 ‘장소의 변화’라는 물리적인 차이일 뿐 내가 서 있는 장소를 옮겨 다닌다고 해서 자유로운 몸이 되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저 떠나고 나면 그걸로 나는 자유로워질 거라 믿었고 꿈꿔 왔던 나의 ‘순수의 시대’는 이것으로 끝이 나는 것인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아버린 자신을 다독이며 새해 첫 주말엔 떡국이나 한그릇 오롯이 끓여 먹어야 겠다.

● 변형 떡국

신정을 쇠는 이들이라면 남은 떡과 육수를 해치운다는 의미로, 설날로 새해를 맞는 이들이라면 겨울에 흔한 가래떡으로 주말 별식을 준비한다는 의미로 ‘변형 떡국’을 만들어보자.

우선, 고수의 향이 이국적인 동남아풍. 음식업계에서 이미 그 입지가 구축된 식재료인 쌀국수를 이용한다. 쌀국수의 두께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육수를 받쳐주려면 0.5㎝ 이상 굵기의 납작국수가 입에 붙는다. 여기에 싱싱한 고수잎이나 다진 홍고추, 약간의 칠리소스 등을 더하면 입맛을 살려준다. 국수가 넓직하므로 떡은 조랑이떡을 넣어 씹는 맛을 다양화하자. 참고로 이 떡국에는 도수 낮은 맥주가 시원하게 어울린다. 라임이나 레몬을 병 입구에 틀어넣은 코로나 맥주라면 금상첨화!

두 번째 변형은 일본식 튀김우동에서 따온 것. 양파나 고구마 등의 튀김과 유부, 어묵을 곁들이고 송송 썬 파를 국물에 듬뿍 넣어준다. 여기에 큼직한 새우튀김이라도 한둘 올리면 세배 온 손님을 위한 점심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국물에 연겨자를 아주 조금 풀어주면 튀김에서 배어나온 느끼한 맛이 줄어든다. 매실주나 차가운 화이트와인 한모금이 맛을 돋우어 줄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중국식인데, 여기엔 육류가 들어간다. 돼지고기나 닭가슴살을 덩어리째 바짝 굽고 청경채와 함께 꿀과 간장으로 달착지근 졸여낸 후 한 입 크기로 썰어둔다. 떡국 국물에는 어슷 썬 홍고추, 청고추와 대파 또는 양파 그리고 두반장을 조금 풀어 매콤한 국물을 만든다. 대접에 떡과 국물을 잘박잘박하게 담고 얇게 썬 파채와 준비해 둔 고기를 몇 점 올려주면 완성이다. 진하지 않은 레드와인이 졸여진 육류를 소화시켜 준다.

● 일상

내친 김에 명절 음식의 변형 아이디어를 몇 가지 더 말해보자. 잡채 끄트머리는 그 들어간 수고를 생각하여 쉬 버리지 못하게 되는데, 이럴 때 만두피에 한 큰술씩 얹어 꼭꼭 빚은 후 군만두로 변신시켜 보자. 친지들끼리 윷이나 화투판이라도 벌였으면 간식으로 딱 좋을 메뉴다. 갈비찜에서 고기는 다 먹고 국물만 남은 경우, 유자차의 유자와 청, 그리고 얇게 썬 청양고추를 섞는다. 횡으로 도톰히 썬 두부를 앞뒤로 바짝 지진후 유자향과 함께 매콤 달콤해진 갈비찜 국물을 소스로 뿌려 먹는다. 밥 반찬으로, 술안주로 좋다. 빨리 쉬어버리는 나물이 남았다면? 한데 모아 잘게 썰어서 찬밥과 비빈다. 식초 약간, 참기름 약간만 첨가한 후 짭조름한 유부 속에 한 술씩 넣어 만드는 변형 유부초밥을 준비할 수 있다.

일상에의 미련없이 소비적으로 지낸 지난 몇 년을 일회용 용기에 그럴듯하게 포장했던 테이크아웃 푸드라 한다면, 작은 의자에 앉아 정갈한 3첩 반상이 먹고 싶어진 나의 2003년은 벌써부터 색다른 설렘을 주기 시작한다. 3첩을 준비하는 격식과 반복에 지쳐 언제 또 플라스틱 용기에 샌드위치 하나 싸들고 도망칠지 모르지만 말이다.

결국 ‘할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서로 ‘행복하게 귀속’되며 끝을 맺는 ‘티파니에서 아침을’. 영화의 속편이 없었기에 할리가 잘 살았을지, 아니면 또 떠났을지를 우리는 알 수 없다. 꿈꾸던 자들의 정착이란 것이 과연 가능한 걸까? 이제는 현실 속에 들어와 버렸다고 서두에 떠들던 필자는 새해 첫 주말 떡국 한 그릇을 앞에 두고 또다시 꿈을 꾸기 시작한다.

● 육류를 올린 떡국

돼지목살 400g 또는 닭가슴살 4, 5조각(각 70∼90g), 간장 2큰술 반, 꿀 2큰술, 파인애플 슬라이스 5개, 청경채 60g, 다진마늘 1작은술, 다진생강 1/2작은술, 양파 1/2개, 식용유, 두반장소스, 파채, 홍고추와 청고추

1.돼지고기나 닭고기는 소금, 후추로 밑간하여 기름을 둘러 달군 팬에 갈색이 나도록 바짝 겉을 익힌다.

2.고기겉이 익으면 건져내고 같은 팬에 양파 슬라이스와 청경채를 볶는다.

3.180도로 오븐을 예열한다.

4.2의 고기와 양파를 얕은 오븐용 팬에 담고 간장, 꿀, 마늘, 생강, 곱게 다진 파인애플을 섞은 소스를 충분히 뿌려서 오븐에 넣고 졸인다.

5.4의 고기를 중간에 한번 뒤집고 팬바닥에 고인 소스를 다시 한번 윗면에 발라준다.

6.떡국국물에 두반장을 조금 풀고 어슷 썬 고추를 넣은 후 생수로 농도를 조절하여 한번 끓인다.

7.그릇에 6의 국물과 알맞게 익은 떡을 담고 곱게 썬 파채, 5에서 익힌 고기 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올린다.

박재은

▼남은 음식, 변형 요리 어때요 ▼

○화보 촬영용, 주문받은 파티용 요리가 연일 넘쳐나는 나의 주방에서는 남은 음식은 어떻게든 변형해서 꼭 먹어 치운다는 규칙이 있다. 예를 들어 냉채가 조금 남았다면 기타 생채나 칵테일용 새우 또는 쪽쪽 찢은 게살을 첨가해서 겨자장에 버무린 후 물에 불린라이스페이퍼로 돌돌 만다. 한식이나 퓨전 식탁에서 훌륭한 애피타이저가 된다.

○호박죽이 남으면 죽 자체를 원액으로 삼아 약간의 닭육수와 생크림, 물을 붓고 연하게 풀어준다. 여기에 통후추와넛맥(육두구)을 갈아주고 싱싱한 허브잎을 띄우면 프랑스식 호박수프가 된다.토스트와 어울린다.

○심심담백한 절편이나 가래떡이 남았을 땐 꿀에 묻힌 후 곱게 채 썰어 시럽에 졸여낸 레몬 껍질을 입힌다. 달콤쌉쌀한 디저트가 된다. 남은 백설기는 한입 크기로 썰어서 바짝 튀겨내어 설탕과 계피가루를 뿌려 먹는 별식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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