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선비론]「兩非論」원조 최명길

  • 입력 1997년 11월 22일 08시 09분


요즘 흔히 듣는 「양비론(兩非論)」의 원조를 찾으라면 아마 지천 최명길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인조반정후 서인들이 서로 공을 다투고 있을 때, 그는 참다 못해 중재에 나섰다. 양쪽이 모두 옳은 점도 있고 그른 점도 있으니 중도파를 중용해 극단을 피해야 한다고. 바로 그의 유명한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이었다. 그가 현실주의자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기회주의자와는 그 격이 다르다. 「소신 없음」이 아니라 합리적인 문제해결 방식의 하나였다. 그의 주화론도 이러한 현실주의적 「양시양비론」에 바탕을 둔 것이니 정묘호란 병자호란이란 벼랑끝에서 조선을 건져올린 것이 「양시양비론」이라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의 현실감각은 그래서 임진왜란을 극복한 명재상 유성룡(柳成龍)의 그것과 비교되기에 충분하다. 양시양비론은 또한 분파주의에 대한 경계였다. 그가 대제학이 되어 과거시험을 주관할 때의 일이다. 장원으로 뽑고 싶은 명답안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시험관들은 그 답안 주인공의 문벌이 별로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즉 파벌이 없어 어느 한 계파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최명길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지난날의 관행에 연연해하거나 파벌을 따진다는 것은 지극히 비현실적이라는 주장이었다. 최명길의 소신으로 결국 그 답안의 주인공은 장원의 영예를 누렸으니 바로 송시열(宋時烈)이었다. 최명길의 양시양비론, 현실감각 등이 힘을 발휘하고 조선을 살릴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치열함」이 있었기에 가능풉셈舅潔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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