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남찬순]대통령의 눈물

  • 입력 2002년 6월 24일 18시 49분


한국과 스페인 팀이 피 말리는 120분간의 경기를 끝내고 승부차기에 들어간 22일 광주 월드컵경기장. 이운재가 스페인의 4번째 키커 호아킨 산체스의 슛을 막아내는 순간, 그리고 한국팀의 5번째 키커 홍명보의 볼이 오른쪽 네트에 시원하게 꽂히는 순간, 붉은 물결이 경기장을 휩쓴 그 감동의 순간에 관중석에 앉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모습이 언뜻 TV 화면에 나타났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김 대통령 특유의, 약간은 어색해 보이면서도 천진난만한 듯한 얼굴이 한 순간 클로즈업됐다. 눈시울이 젖어 있는 것 같았다.

▼초라한 지도자의 잔영▼

바로 하루 전인 21일, 김 대통령은 자신의 3남 홍걸씨에 이어 차남 홍업씨가 비리연루 혐의로 구속 수감되자 “모두가 저의 부족함과 불찰에서 비롯된 일로 국민에게 거듭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떨리는 목소리로 사과하는 김 대통령의 모습은 ‘오죽하면 저 지경까지 갔는가’ 하는 안타까움마저 느끼게 했다.

김 대통령은 아들을 감옥에 보내고 참담한 표정으로 국민 앞에 섰다가 불과 하루 사이 월드컵 승리에 환호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전혀 다른 두 모습으로 국민 앞에 나타났다. 누구보다 영욕의 인생을 산 김 대통령이 하루 만에 경험한 또 다른 희비(喜悲)의 반전인가.

한국팀이 스페인팀에 승리했을 때 김 대통령의 모습은 누구에게나 가슴 뭉클한 친근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국민사과를 할 때의 김 대통령은 지도자의 초라한 잔영만 기억에 머물게 했다. 김 대통령이나 현정권에 대한 불신이 그만큼 뿌리깊은 탓이다. 어떻든 김 대통령의 사과는 의도적이든 우연이든, 진실성이 있든 없든 기막히게 타이밍이 맞아 떨어졌다. 월드컵 열기가 김 대통령의 사과를 ‘압도’해 뒷말이 쑥 들어갔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김 대통령도 다른 역대 대통령 못지않은 업적을 남겼다. ‘외환위기’를 무난히 넘겼다. 역대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과 회담했다. 그 덕택에 한국인으로서는 일찍이 꿈꾸지도 못했던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다. 또 월드컵 경기도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고 한국팀이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4강전에 진출하는 영광을 차지했다. 김 대통령은 이 중 어느 한가지만 택해도 훌륭한 대통령의 반열에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역사적인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김 대통령의 모습은 어떤가. 세계 어느 나라를 둘러보아도 대통령이 재임 중에 자기 아들을 두 명이나 감옥에 보낸 이는 없을 것이다. 월드컵 관광을 온 외국 사람들에게는 김 대통령이 그만큼 부정과 비리척결에 철두철미했다는 뜻으로 잘못 들릴지 모르겠다. 얼마나 역설적인 얘기인가. 김 대통령은 아들 두 명이 구속되어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한 정권을 이끌어 온 것이다.

지난 4년간 김 대통령은 너무나 ‘위대한 대통령’만 되려고 했다. ‘통일 대통령’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내걸고 거기에만 몰입하다 보니 일상의 일들은 자연히 눈에 띄지 않게 됐다. 권력 주변에 곰팡이가 피고 집안에 ‘부정한 손님’들이 들락거려도 미처 단속을 못했다. 그 결과 김 대통령에게는 지금 영광스러운 퇴임 대통령의 길조차 열려 있지 않은 것 같다. 준비된 대통령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던 취임식 때 모습도, ‘제왕적 권위’도 모두 퇴색했다. 국정을 힘겨워하며 고개를 넘어가는 노(老)대통령의 긴 그림자만 보인다. 대통령도 정권도 모두가 지쳐 있다.

▼남은 임기가 말해 준다▼

다시 축구를 생각하자. 왜 이처럼 온 나라가 축구에 열광하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한국팀이 국민의 기대를 계속 충실히 채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기대와 성과가 서로 상승작용을 해 엄청난 에너지를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김 대통령이나 현정권에 대한 기대가 있으면 얼마나 더 있겠는가. 김 대통령이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월드컵의 성공, 노벨상 수상의 본래의‘빛’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김 대통령은 국민 사이에 ‘기대의 싹’이 트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 기대를 살리고 부응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

김 대통령에게는 아직 임기 종료 휘슬이 불지 않았다. 이탈리아에 패색이 완연했던 한국 팀은 후반전 끝나기 직전에 천금같은 한 골을 넣어 승리의 기반을 다졌다. 스페인전에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혈투를 했으나 그때까지 승리는 한국의 것이 아니었다. 고대하던 승리의 여신은 마지막 순간 승부차기를 할 때 한국팀에 다가왔다. 김 대통령에게 남은 8개월간의 임기는 결코 긴 것이 아니지만 여전히 기회는 있다.

남찬순 논설위원 chans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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