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준칼럼]무엇이 김정일을 움직이나

  • 입력 2001년 1월 17일 18시 39분


곧 맞이하는 설을 계기로 용의 해가 끝나고 뱀의 해가 시작된다고 생각할 때 우선 떠오르는 말이 용두사미(龍頭蛇尾)다. 남북관계와 관련해 지난해는 글자 그대로 용의 머리나 다름없었다. 분단 55년의 역사에서 마침내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해 말부터 나타난 조짐들은 이 용 머리가 뱀 꼬리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게 했음이 사실이다. 예정됐던 행사들의 뚜렷한 설명 없는 연기,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준비하기 위해 지난해 12월에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던 북한의 대외적인 국가원수 김영남(金永南)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오지 않은 사실, 정상회담에서 양해됐다던 미군의 남한 주둔에 대한 북한의 비난, 북한식 연방제의 강조, 남쪽이 약속했던 경제지원을 해주지 않고 있어 ‘배신감’마저 느낀다는 국제회의에서의 발언, 대북 경제지원을 계속할 만한 여력을 허용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워지리라는 남한 경제에 대한 비관적 전망, 그리고 무엇보다 북한에 대해 강성(强性)외교를 펼 것으로 말해지는 조지 W 부시 공화당 행정부의 출범 등이 그러한 우려의 근거였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이 매우 늦어질 것이거나 사실상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은 그래서 설득력을 얻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되지 않았던 김정일의 중국 방문을 보게 되고 3월 이전 답방 가능성이 우리 정부 당국자의 입을 통해 시사되자 전망은 달라지게 됐다. 더구나 김정일이 새해 들어 ‘신(新)사고’를 강조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가 서울을 찾는 경우 남북관계에 새 국면이 열릴 것 같다는 새로운 기대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中 강력하게 '화해' 촉구한 듯▼

그러면 무엇이 그를 움직이고 있을까? 아마도 중국의 권유가 클 것이다. 중국 지도층은 지난해 때처럼 그에게 남한과 잘 지내는 것이 북한에 큰 도움이 된다고 계속해서 설득하고 있을 것이다. 만일 중국의 강력한 권유로 남북관계에 진전이 있게 되면 부시 행정부가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 국가미사일방어(NMD)체제 등으로 강하게 나올 때 중국 러시아 남북한의 공동대처가 가능할 수 있을 것으로 중국 지도층은 내다볼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미국에서 대북(對北) ‘강경파’의 집권이 김정일을 ‘신사고’와 서울 조기(早期) 방문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분석이다. 돌이켜보면 미국이 지난날 소련을 상대하던 때 그 방법론을 놓고 2개의 학파가 대립했다. 첫째가 리가(Riga) 학파였다. 미국이 소련의 국가적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던 시절, 미국은 소련에 외교 영사공관을 두지 않았다. 그 대신에 인접국가인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 총영사관을 두고 소련의 대내외 상황을 면밀히 연구했다. 이곳의 책임자가 뒷날 미국의 소련대사와 유고슬라비아대사를 지내게 되는 조지 케난 박사로, 그는 이 때의 연구에서 소련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타고난 불량배’라고 결론 내리고 이 ‘악마의 제국’에 대해서는 강경한 봉쇄정책을 써야 하고 건의했다. 그 믿음이 뒷날 저 유명한 ‘X씨의 1947년도 포린 어페어스(대외문제) 논문’으로 이론화됐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둘째가 얄타(Yalta) 학파였다. 1945년 2월에 얄타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의 3대국 정상회담은 미국과 소련의 협력을 2차 대전 이후 국제질서의 기본 틀로 잡아놓았는데 이처럼 소련에 대한 봉쇄가 아니라 소련과의 협력을 중시한 학파를 얄타 학파라고 부른 것이다. 세계 냉전이 끝난 오늘날의 시점에서 학자들은 결국 리가 학파가 소련의 붕괴와 냉전의 해체를 이끌어냈다고 평가한다.

이렇게 볼 때 북한에 대한 포용정책을 추진했던 클린턴 행정부도 북한의 변화에, 그리고 남북관계의 발전에 기여한 것이 사실이지만 ‘강경’정책을 추진하리라는 부시 행정부의 출범이 북한의 변화를 재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리가 학파의 입장에 서서 대소련 강경정책을 밀고 나가 결국 소련의 붕괴를 이뤄낸 조지 부시 당시 대통령의 아들이 백악관을 이끌어가게 됐다는 사실은 북한 지도자들로 하여금 상황을 새롭게 보게 만들었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후세인을 제거하고자 걸프전쟁을 마다하지 않았던 부시 당시 대통령의 국방장관 럼스펠드가 다시 국방장관으로, 합참의장 파월이 이번에 국무장관으로 내정됐다는 사실도 결코 경시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민주주의 공고히 해야▼

북한이 보내주는 긍정적인 새로운 반응을 국제관계사의 큰 흐름 속에서 그렇게 볼 때,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다시 케난의 논문으로 돌아가자.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거듭 강조했다. 소련에 맞서기 위해 미국을 더욱 민주화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북한을 우리가 바라는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한 가장 큰 방법은 바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최근 몇몇 외국인들이 지적했듯이 우리나라가 여전히 ‘과두정치’의 수준에 머물러 있어선 곤란하다. 그 점에서 여야 모두, 그리고 사회 각계 지도층 모두가 진정으로 민주화의 마지막 단계인 ‘민주주의의 공고화(鞏固化)’에 힘써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북한이 남한과 손잡고 좋은 방향으로 움직여 갈 수 있도록 북한의 변화노력을 돕는 것이 좋겠다.

김학준<본사·상임고문>ha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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