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마을 현장을 가다 5]방글라데시 '그라민 은행'

  • 입력 2002년 7월 30일 18시 37분


《방글라데시가 한국 언론의 주목을 받을 기회는 별로 없다. 사이클론 등 자연재해로 한꺼번에 수천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수백명씩 사망이라도 해야 소개되는 정도다. 인구는 많아서 1억3000만명. 인구의 36%가 극빈선 밑에서 허덕이고 있다. 1인당 연간국민총소득(GNI)은 370달러(48만원)에 불과한데 지난해 국제투명성기구(TI) 조사결과에 따르면 국가부패지수는 세계 최고다. 이처럼 부정적인 이미지로 가득찬 이 나라가 세계에 수출하고 있는 ‘금융상품’이 있다. 무담보 소액 신용대출(마이크로 크레디트· Micro Credit)이 그것. 이 상품은 그라민은행에서 판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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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 유누스 그라민은행장(62)은 치타공대학 경제학과 교수 시절인 1976년, 고뇌 끝에 자선만으로 빈곤을 퇴치할 수 없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자선은 일시적으로 가난을 멈추게 할지는 몰라도 돈이 떨어지면 다시 가난해지는 빈곤의 악순환은 계속된다.

차례 기다리는 대출자

그러나 자산이 없는 빈민들은 담보를 요구하는 은행에서 종자돈을 빌릴 수 없었다. 유누스 교수는 그래서 빈민들이 자립기반을 쌓도록 신용만으로 대출해주는 은행을 설립했다. 낮은 이자로 빌려준 뒤 조금씩 오랜 기간에 걸쳐 갚아나가도록 했다.

26년 전 첫 대출금은 42명에게 27달러를 빌려준 게 고작이었다. 지금은 전국에 1175개의 지점을 두고 240만명에게 1600억다카(약 3조3600억원)를 대출하는 준직원수 1만2000여명의 대형은행으로 성장했다. 이제 마이크로 크레디트는 미국 영국 프랑스와 같은 선진국으로 수출돼 빈곤퇴치를 위한 대안으로 각광받고 있다. 방글라데시에서만 대출자의 42%가 빈곤선을 넘었다.

14년 전 그라민은행에서 3000다카(약 6만3000원)를 빌려 뻥튀기 장사를 시작한 디팔리 라니(40)는 “당시 나는 한달 평균수입이 500다카(약 1만500원)에 불과한 극빈층이었지만 지금은 한달에 3만다카(약 63만원)를 버는 중산층”이라고 말했다.

사실 기존은행에서 보면 위험한 영업방식이다. 그라민은행은 더구나 돈을 갚지 않는다고 월급을 차압하거나 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 부자 고객이 아니라 정말 가난한 사람만 골라서 대출해 준다.

그런데도 대출상환율은 76년 이후 평균 90% 이상을 웃돈다. 경영 실적도 좋다. 93년 흑자로 돌아선 뒤 외부 자금 지원 없이 대출자들의 저축과 이자만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자율이 다른 은행보다 높아 저축도 몰린다.

비결은 역시 신용에 있다. 대출자가 제때 돈을 갚지 않거나 은행이 실시하는 훈련 프로그램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으면 돈을 빌리기 어렵다. 지점 안에서 한 사람이라도 신용이 나쁘면 다른 대출자들 역시 대출한도 등에서 불이익을 받기 때문에 보이지 않게 서로 신용을 담보하게 된다. 신용을 개개인의 이익과 연계하고, 다른 대출자들의 이익과도 연계해 신용을 철저히 관리하게 하는 전략이다.

나고리 칼리곤즈에 사는 아크히아 베굼(40)은 “하루 20∼24시간을 일하면서 상환금만큼은 비상금으로 항상 챙겨뒀다”고 말했다. 대출자들은 비혈연관계인 5명으로 소모임을 구성해야만 돈을 빌릴 수 있고, 은행 가입시 ‘언제나 남을 돕는다’는 약속을 한다.

은행은 주1회 정기 모임을 의무화해 대출자들에게 경제적 도움뿐만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가르친다. 가난은 ‘돈’만으로 헤쳐나갈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모임에서는 풍토병 예방법, 깨끗한 물을 마시는 법 등 생활수준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교육을 실시한다. 여기서 자신의 이름조차 쓸 줄 몰랐던 대출자들이 글을 배우고, 사회에 눈을 뜬다.

‘빈곤의 문제는 바로 여성의 문제’라는 게 그라민의 철학. 성차별 때문에 같은 가정에서 여성이 느끼는 빈곤의 고통은 더욱 심각하다. 때문에 대출자를 선정할 때 여성이 우선이다. 전체 대출자 236만명 가운데 여성이 224만명으로 95%를 차지한다.

여성의 사회활동을 제한하는 이슬람 문화 탓에 ‘죽은 듯 지내온’ 여성들이 그라민은행을 통해 당당히 사회로 나서고 있다.

교육받은 대출자들의 사회의식이 높아지면서 방글라데시 정부가 그라민은행을 정치적 경쟁세력으로 의식할 정도다.

▼유누스 그라민은행장▼

섭씨 30도가 넘는 후텁지근한 날씨에도 그라민은행 무하마드 유누스 행장(62·사진)의 방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천장에서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에 날려갈까봐 책상 위에 쌓인 서류들을 이것저것으로 눌러 놓은 방안의 풍경은 방글라데시에서는 그리 낯선 것은 아니다.

-빈곤은 세계화의 대표적인 부작용이다. 그러나 빈곤과 싸우는 당신은 미국 유학까지 마친 세계화된 사람이며, 은행이라는 시스템 역시 현대적인 제도다. 그라민이 지향하는 것은 세계화인가 아니면 반세계화인가.

“세계화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문제는 세계화를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만드느냐는 것이다. 잘못된 세계화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 약한 국가의 경제를 마비시킨다. 그러나 올바른 세계화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 특히 정보화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세계화를 막기보다는 올바른 세계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어떻게 100%에 가까운 대출상환율을 유지하나.

“우리 은행은 ‘찾아가는’ 은행이다. 대출자들을 한가족처럼 돌본다. 은행 대출금의 67%는 대출자들의 저축액에서 나온다. 자신의 돈을 다시 대출하는 셈이기 때문에 대출자들은 은행의 주인이라고 느끼게 된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상환을 제때 하는 것이 결국 스스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믿음을 만드는 것이다.”

-담보 없이 어떻게 신용만으로 거래를 텄나.

“은행 설립 당시 가난한 사람들은 사채업자들에게 매우 어려운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돈을 제대로 갚았다. 그런데 은행은 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시험삼아 27달러로 담보 없이 돈을 빌려줘 봤다. 빠짐없이 돌아왔다. 계속 대출금을 늘려 봤다. 그때마다 모두 돈을 갚았다.

-대출자의 상호감시도 상환을 강제하는 것 같다.

“상호감시라기보다는 상호지원이라고 해야 옳다. 서로 어려울 때 도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친구들보다 못나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이 상환을 독려한다. 심리적 영향도 있다. 성공을 느껴본 적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상환할 때마다 성취감을 느끼게 된다. 자신을 무기력한 존재로 여겼던 사람들이 존재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한국에도 지부…월소득 100만원이하 대출자격▼

한국에서도 부스러기사랑나눔회가 ‘신나는 조합’이라는 그라민은행 한국지부를 운영하고 있다. 신나는 조합은 씨티은행이 종자돈으로 5만달러(약6000만원)를지원해 2000년 설립됐다. 대출 및 운영 방식은 방글라데시 본부와 같다. 대출받는데 보증인도, 담보물도 필요 없다. ‘가난한 사람’임이 확인되면 그만이다.

3000평 이하의 땅을 가진 농민과 월소득 100만원 이하, 자산소득 3000만원 이하의 도시 거주민이어야 한다.

자격 조건이 되면 경제력 교육정도가 비슷하고 가까운 지역에 사는 사람들 5명(가족 제외)을 모아 소모임을 구성해야만 대출받을 수 있다. 1인당 최대 대출금액은 기본 100만원이다. 이자는 연 4%, 1년 상환의 경우 주당 2만3000원, 2년 상환의 경우 주당 1만1000원씩 갚으면 된다. 매주 1회 이상 조합활동과 관련한 교육 및 훈련을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

현재까지 모두 48명이 조합에서 돈을 빌렸고, 지금은 26명이 대출을 받아 사업을 하고 있다. 이들은 분식점을 운영하거나(서울) 엿 호떡장사 및 유기농사업(강화), 애견사육(전라), 농산물 재배가공(경상) 등으로 돈을 벌고 있다.

신나는 조합의 연락처는 02-365-1265, 홈페이지는 www.joyfulunion.or.kr다.


다카(방글라데시)〓곽민영기자 havef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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