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ing Travel]유리처럼 맑은 호수에 구름이 둥둥… 천국의 풍경이 이러할까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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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하 기자의 힐링투어]핀란드 사이마 호수를 찾아서

하늘까지도 풍덩 빠뜨릴 만큼 크고 넓은 사이마 호수는 그 자체로 흰색 바탕에 파란 십자가의 핀란드 국기와 상통한다. 케리매키의 호반에서 10월에 촬영. 핀란드=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하늘까지도 풍덩 빠뜨릴 만큼 크고 넓은 사이마 호수는 그 자체로 흰색 바탕에 파란 십자가의 핀란드 국기와 상통한다. 케리매키의 호반에서 10월에 촬영. 핀란드=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우리가 아는 핀란드는 이 정도다. 사우나(200만 개), 호수(18만7888개), 백야, 산타클로스우체국, 노키아, 디자인·교육 강국….

그런데 이걸론 부족하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 대안으로 각광받는 컴퓨터운영시스템 리눅스(Linux),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서비스,

인터넷 실시간 채팅, 식기건조 캐비닛, 몰로토프 칵테일(화염병), 유럽최초 여성참정권. 이 모든 게 핀란드에서 창안됐다.

우리만큼 가라오케에 열광하고 지구촌에서 인구(549만 명)대비 오케스트라 수(22개)가 가장 많으며 클래식연주 감상 최다(20%가 연1회 이상)에

탱고가 아르헨티나 밖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나라라는 사실도 아는 이가 별로 없다. 그런 핀란드를 우린 ‘작지만 강한 나라’라 부른다.

아니다. ‘적지만 강한 나라’가 옳다. 인구는 적어도 영토(33만8424km²)는 대한민국(10만210km²)의 세 배 이상이니까.

이 핀란드를 21년 동안 세 번 찾았다. 두 번은 겨울. 12월 라플란드(북부)는 오전 9시나 돼야 날이 밝고 점심 먹고 나면 밤이 되는 북극권.

긴 겨울밤도 나쁘지 않았다. 장작불 피운 따뜻한 실내에서 내리는 눈을 보며 핀란드산 보드카 ‘핀란디아’를 마시거나 밤하늘의 오로라도 감상할 수

있으니. 낮으로는 스노모빌을 몰고 설산의 침엽수림을 헤치고 다니다 인디언텐트인 티피에 들어가 조각치즈 넣은 커피를 나무잔에 담아 홀짝이며

툰드라지대 원주민인 사미(Sami) 족과 담소하거나 결빙된 호수의 설원을 눈보라를 일으키며 질주하는 호사도 즐겁다.

하지만 어둡고 춥고 긴 겨울을 해가 지지 않는 한여름 백야보다 좋아할 이는 흔치 않다. 호수천국인 만큼 핀란드 여행의 백미는 역시 여름이다.

국기를 보자. 흰 바탕에 파란 십자가인데 그 자체가 호수다. 파란색은 물과 하늘, 흰 바탕은 구름. 그러니 겨울 아닌 핀란드를 여행하지 못했다면

아쉬울 수밖에. 그러다 지난해 9월 기회가 왔다. 헬싱키 재즈페스티벌 취재였다. 재즈 페스티벌 취재를 마친 나는 헬싱키중앙역에서 기차를 타고

북서쪽 340km의 사본린나(Savonlinna)로 직행했다. 핀란드에서도 가장 크고 멋진 사이마 호수를 찾아.》

핀란드인에 대한 오해와 진실

지금도 여행안내서엔 이렇게 기술돼 있다. ‘핀란드인은 말이 없다. 하지만 사우나에선 다르다. 그러니 비즈니스 상담은 사우나에서 하라.’ 그런데 이는 더이상 ‘사실’이 아니었다. 밤 9시 반 내가 내린 파릭칼라 역에서 내 이름을 부르며 뛰어온 야나 코스티(사본린나지역관광청 국장)를 통해 그걸 단박에 깨우쳤다. 아바(ABBA)의 노래 ‘워털루’의 신나는 리듬만큼이나 활달한 중년의 이 여인. 이튿날 나를 남편과 인사시키더니 저녁엔 호숫가의 여름 집에 초대했다. 그리고 나는 남편과 사우나까지 한 뒤 저녁식사 대접까지 받았다.

시청공무원인 남편도 말이 없다는 핀란드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초면의 두 남자는 사우나에서 난로에 구운 소시지를 나눠 먹으며 단박에 친구가 됐다. 부부는 가을부터 봄까지 지내는 시내의 겨울 집까지 보여주며 환대했다. 핀란드 사람들은 보통 집을 두 채 갖고 있는데 여름 집은 이렇게 호숫가에 두고 5월부터 9월까지 산다. 부부의 여름 집은 최근 지은 2층짜리로 동생과 부모의 집과 이웃했다. 대가족이 수시로 모여 사우나와 수영도 하고 바비큐 파티를 즐긴단다.

물론 이건 최근에 일어난 변화다. 미난 시르뇌 의원은 일카 타이팔레 박사가 엮은 ‘핀란드가 말하는 핀란드 경쟁력 100’이란 책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핀란드 사람은 세계적으로 느리고 내성적이고 불평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요즘은 크게 달라졌다. 전통적으로 판에 박은 듯한 핀란드 사람의 모습은 지난 20∼30년에 신기원적인 기술 창안인 휴대전화와 가라오케 덕택에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나도 동의한다. 시내버스에서 핀란드 아줌마의 통화는 쉼이 없었고 가라오케도 핀란드 가정의 25%가 갖출 정도이니. 시르뇌 의원은 글을 쓸 당시 ‘핀란드의회 가라오케클럽 회장’이었다.
사본린나의 상징과도 같은 수상요새 올라빈린나 성. 이 안에서 오페라공연을 감상한다.
사본린나의 상징과도 같은 수상요새 올라빈린나 성. 이 안에서 오페라공연을 감상한다.

천국을 닮은 호수와 숲 그리고 하늘

이른 아침 눈을 뜨자마자 밖으로 나갔다. 한밤에 든 호텔이라 주변이 궁금했던 것인데 역시…. 호수가 나를 맞았다. 호반은 온통 숲. 그 호수엔 또 다른 세상이 담겨 있었다. 하늘이다. 하늘은 수면에 반사된 구름을 통해 그 존재를 드러냈다. 유리처럼 매끄러운 수면은 거울이었고 거기엔 구름 점점이 박힌 하늘이 예쁘게 담겼다. 그 풍경에서 평화가 느껴졌다. 어느 누구로부터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히 침잠할 수 있는 자유….

이곳은 케리매키라는 작은 마을의 외곽 호반. 사본린나에서 그리 멀지 않다. 코스티를 따라 나는 자전거로 이 푸루베시 호수의 도로를 달렸다. 사방천지 물과 숲, 하늘뿐인 이곳. 길은 숲으로, 호숫가로 이어지더니 어느새 케리매키 마을로 들어섰다. 가을로 치닫던 계절의 변화는 자작나무가 정확히 일러주고 있었다. 노랗게 변해 떨어지던 푸른 잎사귀가 그것. 그 바람에 귀부인의 뽀얀 피부 같은 하얀 수피가 더더욱 희게 다가왔다. 마을 중심은 나무로 지은 커다란 교회. 세상에서 목조 교회로는 이보다 큰 게 없다는데 그 사연이 재밌다. 센티미터(cm)단위로 설계한 도면을 시공자가 ‘인치’(2.54cm)로 오해해 지은 ‘위대한 실수’ 덕분이다.

교회 앞엔 자그만 식당이 있었다. 늦은 아침을 먹던 주민 몇이 동양인의 방문에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동양인이라곤 거의 볼 수 없는 곳이어서다. 케이크와 따뜻한 커피가 케리매키의 한가로움을 배가시켰다. 호반의 케리매키는 마을 자체가 공원 같았다. 또 하나 눈길을 끈 건 빨간 페인트칠을 한 보트하우스. 호수가 육지보다 넓은 사이마 호수에선 차보다 배가 더 편리하다. 교회나 시장도 배로 다닌다. 보트하우스는 그런 일상의 중심에 있다.
가을을 맞아 황금빛으로 변한 케리매키 호반의 자작나무 숲.
가을을 맞아 황금빛으로 변한 케리매키 호반의 자작나무 숲.

광대한 레이크랜드(Lakeland) 사이마 호수

사이마 호수는 러시아와 맞닿은 핀란드 동부 저지대에 흘러든 빙하수로 이뤄진 빙하호다. 면적은 4400km². 제주도의 2.4배로 유럽대륙에서도 네 번째로 크다. 호수는 미국의 오대호 같은 웅덩이가 아니다. 섬 1만4000개가 꽃등심의 지방질처럼 수면에 흩뿌려져 있는 모습이다. 사본린나는 그런 물의 나라 호반타운 중 하나. 호수는 러시아의 ‘물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와도 연결된다. 그래서 러시아인이 많이 찾는다. 그 최초는 제정러시아황제 알렉산드르 1세(재위 1801∼1825)다. 그는 케리매키 방문 후 ‘너무 아름다우니 절대로 경관을 해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이튿날 아침 사본린나를 찾았다. 작고 아담하며 사랑스러운 호반도시다. 선착장에선 아직도 100세가 넘은 구식 증기선이 오가고 있다. 타운의 심벌인 올라빈린나(올라빈 성)도 500년 역사의 중세 성이다. 그리고 호반타운답게 이 성은 바위섬을 점거하듯 차지하고 있다. 1471년 모스크바대공국이 노보고로드 공국(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사이)을 병합해 칼마르동맹(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의 3국 연합체로 당시 핀란드는 스웨덴왕국령)을 위협하자 경계를 강화하느라 세운 수상요새다.

우리만큼이나 지난한 핀란드 역사

15세기 이후 핀란드는 스웨덴왕국 지배를 받던 동부의 전초기지였다. 그래서 스웨덴을 위해 싸워야 했다. 18세기엔 러시아에 점령돼 1918년 러시아혁명이 나자 친공 대 반공으로 갈려 내전까지 치렀다. 내전은 독일 도움으로 수습됐다. 그래서 독일의 위성국가로 전락할 처지가 됐다. 다행히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그런 신세를 모면했다. 동시에 독립을 이룬다. 하지만 2차대전 중인 1939년엔 소련 영향권에 든다. 리벤트로프(나치독일 외상)-몰로토프(소련 외상)밀약에 따라서다. 그게 소련과 두 차례나 전쟁을 치르는 발단이 됐다. 그때 몰로토프 칵테일(화염병)이 나왔다. 열세의 핀란드 군이 고육지책으로 개발한 대전차 무기였다. 전과는 연패. 그 결과 1944년 동부를 소련에 내준다. 이어 북부점령 독일군을 내몰기 위한 라플란드전쟁에 돌입한다. 종전 후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유지했다. 소련과도 우호관계를 맺으며 경제개발에 힘썼다. 당시 소련은 핀란드를 서방의 무역창구로 삼았다.

세계최초 오페라 페스티벌의 무대 올라빈린나

올라빈린나가 있는 섬은 물길 세 개가 만나는 사본린나 타운의 강변. 성은 돌출한 5개의 높은 망루와 5층짜리 종탑으로 이뤄져있는 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내가 찾은 그날은 가을비 속에 물안개까지 피어올라 더욱 신비롭게 다가왔다. 성은 강변에서 다리와 부교로 연결됐다. 성안은 의외로 단조롭다. 실내 곳곳은 회의실과 식당, 상점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특별한 것은 중정(中庭)을 오페라공연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 1912년에 시작돼 야외오페라축제로는 효시로 불리는 ‘사본린나 오페라 페스티벌’의 무대가 이곳이다.

한여름 핀란드의 최고 매력은 자정에도 날이 훤한 백야(白夜). 그리고 사본린나 같은 호반의 시원함이다. 그런 만큼 오페라를 야외에서 감상하기엔 여기가 최고다. 그걸 이런 중세고성에서, 그것도 물위에 뜬 듯한 요새 안에서 감상한다니 사람이 몰릴 수밖에. 한 달이나 계속되는 축제에는 6만여 명이 참가한다. 25%가 외국인이다. 올해엔 ‘메리위도’ ‘피가로의 결혼’ ‘토스카’ 등 다섯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더불어 핀란드가 낳은 거장 시벨리우스(1865∼1957)의 탄생 150주년 기념공연 역시 이 성에서 열렸다. 내년(7월 8일∼8월 6일)엔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기념해 베르디의 셰익스피어 작품 ‘맥베스’ ‘오셀로’ ‘팔스타프’를 ‘라보엠’ ‘노르마’와 함께 올릴 예정이다.

summ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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