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로 노화 예측-mRNA 백신… ‘R&D First’ 속도낸다

  • 동아일보

고대의료원 헬스케어 생태계 확장
임상 현장 문제 산업으로 연결… 연구 중심 의료기관 모델 구축
MS-AWS 등과 협업 혁신 연구… mRNA 한타바이러스 백신 개발
건보 빅데이터 센터-기업 등 입주… 정릉 메디사이언스는 핵심 거점

방호복을 착용한 고려대의료원 연구진이 실험실에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방호복을 착용한 고려대의료원 연구진이 실험실에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대학병원의 역할은 더 이상 진료와 교육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임상 현장에서 마주한 문제를 연구로 풀고 이를 기술과 산업으로 연결해 헬스케어 생태계를 확장하는 것이 새로운 책무로 자리 잡고 있다.

미국 보스턴 바이오클러스터(생명공학 협력단지)는 이러한 변화의 상징이다. 약 1200개의 대학·의료기관·기업이 밀집한 이 클러스터는 2023년 기준 연간 77억 달러(약 11조 원) 이상의 투자를 유치하고 약 10만 명의 인력을 고용하고 있다. 지난 25년간 미국 국립보건원(NIH) 연구비 약 450억 달러(65조 원) 중 66%를 병원들이 수주했을 정도로 병원은 연구 생태계의 중심축이다.

국내에서도 대학병원이 연구개발을 성장 엔진으로 삼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고려대의료원(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 윤을식)은 일찌감치 ‘R&D First’를 선언하며 연구 중심 의료기관 모델을 강화해 왔다. 풍부한 임상 데이터와 기초 의과학 역량을 기반으로 산학협력을 활성화하고 연구 성과를 사업화로 연결하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는 데 방점을 찍고 있다.

연구에서 비즈니스로… 산학협력 모델의 고도화

고려대 의대 의공학교실 박용두 교수 연구팀은 지난해 7월 151억 원 규모의 ‘2025년도 제2차 한국형 ARPA-H 프로젝트’에 선정됐다. ‘극초고령사회 노쇠에 대한 인공지능(AI) 기반 예방적 돌봄 서비스 개발’이 주제다. 기존 심폐기능, 근력, 인지기능 중심의 진단을 넘어 대사 능력을 포함한 통합 분석을 통해 노쇠를 정량화하고 예측하는 것이 목표다. 차의과대, 뉴마핏, NHN, 론픽 등 6개 대학·기관이 참여하는 대형 융합 프로젝트로 대학과 기업의 협력이 전제되지 않으면 추진이 어려운 구조다.

신종 감염병 대응과 백신 개발 역시 산학협력의 핵심축이다. 국내 최초 전주기 백신 개발 플랫폼인 ‘정몽구 미래의학관’을 중심으로 추진 중인 ‘프로젝트 H’는 mRNA 기반 한타바이러스 백신 개발을 목표로 한다. mRNA 기술을 보유한 미국 모더나와 한타바이러스를 세계 최초로 발견한 이호왕 박사의 연구 유산을 잇는 고려대 의대 백신혁신센터가 협력하고 있다. 연구진은 현재 비임상 효능 시험을 진행 중이며 2027년 임상 1상 완료를 목표로 하고 있다.

정릉 메디사이언스파크는 이러한 산·학·연·병 협력의 거점이다. 혁신 신약 제조기업 셀랩메드의 GMP 시설이 입주해 있고 국민건강보험공단과 공동으로 ‘건강보험 빅데이터 분석센터’를 운영한다. 병원의 임상 데이터와 건강보험 빅데이터를 결합한 융복합 연구가 가능해졌다. 의료기술지주 공유 사무실을 통해 의료기술 창업 기업을 지원하고 KIST와 함께 서울바이오허브를 운영하며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과의 오픈이노베이션도 가속화되고 있다. 한국마이크로소프트와는 에이전틱, 버티컬, 피지컬 AI를 활용한 의료 의사결정 지원과 정밀의학 체계 구축을 추진한다. 아마존웹서비스(AWS)와는 대규모 유전체 분석 및 신약 개발 연구에 고성능 클라우드 기반을 적용한다. 세스코와는 감염병 전파 차단 기술 개발을 위한 ‘공간전파 특수실험실’을 메디사이언스파크에 설립했다.

의료계 최초 ‘트리플 연구중심병원’… 차별화된 임상 플랫폼

보건복지부 1기 인증 연구중심병원 평가에서 고려대의료원 산하 안암·구로·안산병원은 모두 인증을 획득했다. 세 병원이 동시에 인증을 받은 것은 의료계 최초 사례다.

고려대의료원 산하 안암병원. 고려대의료원 제공
고려대의료원 산하 안암병원. 고려대의료원 제공
안암병원은 클라우드 기반 정밀 의료 병원정보시스템을 구축하고 암 환자 1만546명, 암 유전체 1만158건의 데이터를 축적해 신약 개발과 맞춤 치료 기반을 다졌다. 첨단 의생명공학, 혁신정밀의학, 스마트 헬스케어, 의료데이터사이언스 등 4대 전략 분야를 중심으로 연구 거버넌스를 정비했다. 미국암연구협회(AACR)의 글로벌 프로젝트 ‘GENIE’에 아시아 최초로 참여하며 국제 네트워크도 확대했다.

고려대의료원 산하 구로병원. 고려대의료원 제공
고려대의료원 산하 구로병원. 고려대의료원 제공
구로병원은 지속 가능한 연구 인프라를 구축하고 연구개발 지원 체계를 고도화해 연구 성과 확산에 힘써왔다. 한미혁신성과창출 R&D와 글로벌 의사과학자 양성 사업을 수행하며 대외 협력과 인재 양성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또한 개방형 실험실과 G밸리 의료기기개발지원센터를 운영하며 의료기기 개발 분야의 산학 협력도 강화했다.

고려대의료원 산하 안산병원 전경. 고려대의료원 제공
고려대의료원 산하 안산병원 전경. 고려대의료원 제공
안산병원은 연구 공간을 확충하고 동물·세포 실험 시설을 확대해 기초·중개 연구 기반을 다졌다. 30개 이상의 첨단 공동연구장비(Core Lab)를 운영하고 있으며, 제브라피쉬를 활용한 중개연구, 헬스케어·인공지능, 환경·재생 등 3대 중점 분야를 선정해 집중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R&D First’ 전략… 선순환 생태계 구축


고려대의료원은 2004년 의무산학협력실 출범 이후 조직을 확대해 현재는 산학협력·연구전략·기술사업화·임상 연구지원 등 전담 체계를 갖췄다. 지난 3년간 수주한 외부 연구 과제 규모는 5000억 원을 넘어섰다. 같은 기간 지식재산권 출원은 1000건에 육박하고 계약한 정액 기술료는 1067억 원에 달한다.

김학준 의학연구처장은 “대학병원이 기존처럼 환자 진료에만 머물러서는 비약적 성장을 이루기 어렵다”며 “산학연이 아이디어를 공유해 기술 산업화로 연결하면 치료법과 의료기기 개발로 이어지고 환자와 산업 모두가 혜택을 누리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된다”고 말했다.

대학병원이 연구를 통해 산업과 연결되고 다시 그 성과가 환자에게 돌아가는 구조. 고려대의료원이 제시하는 R&D First 전략은 국내 대학병원이 나아갈 또 하나의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R&D가 성장엔진… 임상에서 산업까지 선순환 체계 만들 것”
김학준 고려대 의학연구처장 인터뷰
김학준 고려대 의학연구처장은 “대학병원이 진료에만 머물러서는 도약적 성장을 이루기 어렵다”며 “산학연이 경계를 허물고 협력해야 의료 혁신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고려대의료원 제공
김학준 고려대 의학연구처장은 “대학병원이 진료에만 머물러서는 도약적 성장을 이루기 어렵다”며 “산학연이 경계를 허물고 협력해야 의료 혁신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고려대의료원 제공
대학병원의 연구는 어디까지 이어져야 할까. 논문 발표와 학술 성과를 넘어 실제 기술 개발과 산업화로 연결되는 구조를 만들지 못하면 연구는 병원 울타리를 벗어나기 어렵다. 고려대의료원은 ‘R&D First’를 내걸고 연구개발을 기관의 핵심 성장 엔진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안암·구로·안산병원이 모두 보건복지부 1기 인증 연구중심병원으로 선정되며 ‘트리플 연구중심병원’ 체제를 갖춘 것도 그 연장선이다.

김학준 고려대 의학연구처장을 만나 대학병원 연구의 방향성과 과제에 관해 물었다.

―기존 대학병원 연구와 비교할 때 가장 근본적으로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과거 대학병원 연구는 ‘연구에서 끝나는 연구’였다. 논문과 학술 발표가 목표였다면 이제는 임상 현장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창업과 사업화로 이어지도록 돕는 구조를 만들고 있다. 임상 의사가 환자를 보며 느낀 문제의식을 기술 개발로 연결하고 국내 임상이 끝나면 해외 진출까지 고려한다. 핵심은 선순환이다. 기술이 시장에서 매출을 내면 다시 연구개발로 투자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연구자와 임상의가 지속해서 토론하고 창업과 경영까지 지원하는 체계 전환을 준비 중이다. 대만이 이런 모델을 비교적 잘 운영하고 있다. 국제적 네트워킹도 강화하고 있다.”

―안암·구로·안산병원이 모두 연구중심병원 인증을 받았다. 동일 모델인가, 분업 체계인가.

“공통된 방향은 ‘연구 기반 임상 플랫폼 강화’지만 자연스럽게 역할 분담이 이뤄졌다. 안산병원은 환경·독성 분야 연구에 특화돼 있고 구로병원은 가산디지털단지와 인접해 의료기기 연구가 강하다. 안암병원은 연구용 영상 장비, 뇌 질환 연구, 정밀의학 분야가 강점이다. 중요한 연구는 각 병원이 모두 수행하지만 특화 영역을 중심으로 경쟁력을 키우는 분업형 구조라고 보면 된다.”

―우리나라 의료기술 연구의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인가.

“바이오 분야는 허가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의료기술이 시장에 진입해 매출을 내기까지 평균 6년 정도가 걸린다. 특히 바이오는 인내가 필요한 산업이다. 문제는 국내시장 규모가 작다는 점이다. 기술을 개발해 창업하고 투자를 받더라도 확장 단계에서 주저앉는 기업이 많다. 미국이나 중국은 정부와 민간이 함께 장기 투자를 한다. 우리나라의 관련 펀드 규모는 미국이나 중국의 10분의 1 수준이다. 기술을 산업계에 안착시키는 지원이 부족하다. 디지털 헬스케어도 허가 절차는 간소화되고 있지만 시장에 나오면 급여·비급여 문제와 수익성 한계에 부딪힌다. 결국 정부의 전략적 펀드와 장기 지원이 필요하다. 바이오는 호흡이 긴 분야다. 기다려줄 수 있는 문화와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연구 성과가 실제 사업화로 이어지기까지 의료원의 역할은 무엇인가.


“오픈이노베이션이 핵심이다. 대형 제약사와 투자자를 초청해 기술 설명회를 매년 열고 있다. 연구만으로는 부족하다. 투자 연결이 중요하다. 해외 진출도 적극 추진한다. 미국 보스턴의 바이오 네트워크와 협력하고 있고 투자사와의 미팅을 정례화했다. 다국적 제약사들이 최근 중국 대신 한국에서 임상을 검토하는 분위기다. 이는 우리에게 기회다. 의료는 ‘될 만한 기술’을 기획해 창업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초기 투자 생태계를 넓히기 위해 다양한 벤처 투자자와 협력하고 있다.”

―글로벌 임상을 하기에 한국의 환경은 어떤가.

“한국은 임상시험 환경이 국제 표준에 부합한다. 환자 보호 체계도 갖춰져 있다. 글로벌 제약사들이 한국에서 임상을 진행하는 이유다. 난치질환, 암, 류머티즘 등 임상적 유용성이 높은 분야에서 활발하다. 미국 진출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해외 투자 유치를 병행하며 기술 가치를 높이는 전략이다. 글로벌 제약사와의 협의도 진행 중이다.”

―R&D 생태계 강화가 환자에게는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체감할 변화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병원 안에서 자율주행 물류 로봇이 움직이고 있고 스마트 병동 설계가 진행 중이다. 화성에 신설하는 동탄병원을 시험대로 삼아 임상 적용까지 이어질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려 한다. 연구는 결국 환자에게 돌아가야 한다. 치료 접근성이 좋아지고 신기술이 더 빠르게 임상에 적용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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