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에도 마라톤 풀코스 완주…도전 없는 삶은 죽은 것”[양종구의 100세 시대 건강법]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1월 26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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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송천 교수가 10월 열린 춘천마라톤에서 질주하고 있다. 문송천 교수 제공.
문송천 교수가 10월 열린 춘천마라톤에서 질주하고 있다. 문송천 교수 제공.
“제가 마라톤 풀코스를 40회 정도 달렸어요. 그런데 완주를 위한 달리기 훈련을 하지 않는다면 믿으시겠어요? 진짜입니다. 전 걷는 것으로 마라톤 훈련을 대신했어요. 그렇게 4시간 20분에서 30분에 완주했습니다. 대회 2개월 전부터 많이 걸었을 땐 3시간47분에 완주하기도 했죠.”

문송천 KAIST 경영대학원 명예교수(70)는 3년 전 마라톤 은퇴를 선언했다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65세를 넘겨 더 이상 마라톤 42.195km 풀코스 완주는 무리라고 생각하고 2019년 서울국제마라톤 겸 동아마라톤에서 풀코스를 완주한 뒤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에 너무 움츠러져 있던 생활에서 탈피하고 싶어 다시 도전하게 됐다. 그는 “코로나19가 터진 뒤 영국 러프버러대에 초빙교수로 갔다 2년 만에 돌아왔다. 영국에서도 락다운(lockdown)을 많이 해서 운동을 기회가 많지 않았다. 내 체력이 어느 정도인지 테스트 하고 싶어 달렸다”고 했다. 락다운은 군사계엄령 내린 것과 같이 어떤 활동도 금지되는 상황이다. 그는 올 가을 춘천마라톤에서 4시간50분대에 완주했다. 당분간 마라톤 풀코스 도전은 계속 하겠다고 했다.

“오래 사는 것보다는 건강하게 사는 게 중요합니다. 아직 무릎과 발목에 전혀 문제없어요. 하지만 모든 운동은 무리하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제가 아직 풀코스를 달릴 수 있는 이유는 무리하지 않고 늘 걷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론 80세까진 풀코스를 완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손천 교수가 가방을 들고 힘차게 걷고 있다. 문 교수는 20여년 전부터 자가용 차까지 버리고 속칭 ‘BMW 버스 메트로 워킹) 족’으로 매일 걷으면서 건강을 챙기고 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문 교수는 마라톤 풀코스 훈련을 걷기로 하고 있다. 20여 년 전부터 자가용 차까지 팔고 속칭 ‘BMW(버스 메트로 워킹) 족’으로 매일 걸어서 건강을 다지고 있다. 집 서울 압구정에서 연구실이 있는 강북 홍릉까지 12km를 매일 걸어 출근했다. 경기도 과천으로 이사를 간 뒤에는 압구정까지 버스를 타고 간 뒤 걸어서 학교까지 간다.

문 교수가 달리기 시작한 계기는 1990년대 말 불거진 ‘Y2K(컴퓨터2000년 문제)’ 문제 해결. ‘국내 전산학 박사 1호’인 그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Y2K국제대회 한국대표로 활약했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Y2K를 해결하기 위해 1년 반 동안 브라질을 2박 3일 만에 다녀오는 등 전 세계 15개국을 돌아다녔다. 그러다보니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이러다 잘못하면 쓰러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쯤 엘리트 위주의 마라톤 대회가 일반인들에게 개방됐다. 그래서 달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문 교수는 “마라톤에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기적이 있다”고 했다.

“이 기적은 출발한 뒤 30km 지점에서 일어납니다. 스스로도 도저히 완주하지 못할 것 같던 게 30km 지점을 통과하면서 가능으로 역전되는 것을 느낍니다.”

문 교수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될 것 같은데 이 ‘큰 일’을 자기 몸에서 나오는 능력만으로 해낸다는 것이 기적이라는 것이다.

문송천 교수(오른쪽)가 아내 이혜경 교수와 한 마라톤에 참가해 포즈를 취했다. 문송천 교수 제공.
문송천 교수(오른쪽)가 아내 이혜경 교수와 한 마라톤에 참가해 포즈를 취했다. 문송천 교수 제공.

문 교수는 혼자만을 위해 달리지 않았다. 마라톤에 처음 참가했던 2000년부터 ‘1미터 10원’을 기부하며 지인들에게 ‘1미터 1원’을 권유했다. 풀코스를 완주할 경우 본인은 42만1950원을 내고 지인들은 4만2195원을 낸다. 문 교수는 지금까지 마라톤으로만 6000여 만 원을 내놨고 방송 출연료(30년간 고정출연 2500회) 1억 원을 쾌척했다. 모두 백혈병 어린이 돕기 등 이웃돕기에 썼다.

“제 아내(이혜경 용인예술과학대 컴퓨터과 교수)와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44)이 후원자입니다. 두 사람 다 1m 10원 운동에 적극 동참해줬습니다. 아내는 직접 뛴 적은 많지 않지만 제가 완주하면 매번 골인 지점에서 절 기다렸어요. 오닐 씨는 2009년 그의 첫 풀코스 레이스를 제가 이끌어 주면서 같이 뛰게 됐죠.”

문 교수는 오닐 씨의 인생 역정을 알게 된 뒤부터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6·25 전쟁고아로 미국에 입양된 오닐 씨의 어머니는 어릴 때 고열로 인해 지적장애인이 됐고 미혼모로 그를 낳았다. 문 교수는 “오닐 씨의 어머니는 장애인 마라토너로 활약했다. 그 재능을 물려받아서인지 오닐 씨도 풀코스를 보통 3시간30분 이내에 뛴다”고 했다. 문 교수는 아내와 풀코스와 하프코스 동반완주를 7회 했다.

문송천 교수(뒷줄 가운데)가 KAIST축구팀 지도교수 때 모습. 문송천 교수 제공.
문송천 교수(뒷줄 가운데)가 KAIST축구팀 지도교수 때 모습. 문송천 교수 제공.

문 교수는 대학 1학년 때부터 운동을 생활화했다.

“제가 문과에서 이과로 옮겨 대학에 들어갔어요. 수학이 달렸죠. 그래서 대학 1학년 때 부족한 공부 따라가려고 무리하게 밤을 새다 쓰러졌어요. 급성 간염으로 숟가락 젓가락도 못 들 정도로 기력이 빠졌죠. 그 때부터 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회복 된 뒤로 축구공을 늘 매고 다니며 공을 차며 몸을 다졌어요.”

대학 시설 ‘축구선수’로 불릴 정도로 이름을 날렸다. 대학원 시절 테니스 치기도 시작했다. 어릴 때 단거리 달리기를 잘 했던 문 교수는 하는 스포츠마다 두각을 나타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축구공을 차며 녹색 그라운드를 누볐다. KAIST에 축구팀을 만들었고 경영대학원 ‘축구지도 교수’까지 했다. 테니스로는 30년 넘게 KAIST 최강으로 군림했고 전국 전산인 테니스대회에서 우승까지 했다. 아직도 주 2~3회 2시간 이상 테니스를 치고 있다.

문송천 교수가 서울 동대문구 회기로 KAIST 서울캠퍼스 테니스코트에서 백핸드 발리를 하고 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학교 테니스 챔피언이 저에게 도전합니다. 순발력과 파워 등에선 달리지만 아직 제가 지지는 않습니다. 40년 가까이 테니스 친 노하우가 있어 밀리지는 않습니다. 걷기로 다져진 체력도 한몫하죠.”

이렇게 활동적이다 보니 문 교수는 평생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없다. 코로나19 백신은 맞았지만 감기 등 예방 주사는 단 한번 맞지 않았다.

문 교수는 도전이 없으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제가 운동을 한 뒤 뒤늦게 체력이 좋다는 것을 알고 운동을 생활화 했습니다. 한 끼는 굶어도 운동은 절대 거르지 않습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움직여야 합니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인간은 달린다.’ 살아있는 한 체코의 마라톤 전설 에밀 자토펙의 명언을 실천하겠다는 각오다.

문송천 교수가 서울 동대문구 회기로 KAIST 서울캠퍼스 테니스코트에서 백핸드 드라이브샷을 하고 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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