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기똥풀, 바람꽃…우리말 이름 붙여 일제강점기 극복 앞장선 과학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28일 15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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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식물향명집’의 저자들은 전추라(剪秋羅)라는 중국식 이름 대신 동자꽃(왼쪽), 야인과(野人瓜)라는 일본식 이름 대신 멀꿀이라는 우리말 이름을 붙였다. 출처 국회도서관,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 동아일보
‘조선식물향명집’의 저자들은 전추라(剪秋羅)라는 중국식 이름 대신 동자꽃(왼쪽), 야인과(野人瓜)라는 일본식 이름 대신 멀꿀이라는 우리말 이름을 붙였다. 출처 국회도서관,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 동아일보
금낭화, 애기똥풀, 바람꽃….

정겹고 예쁜 우리말 식물 이름이 탄압이 극심했던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과학은 일제의 서슬 퍼런 탄압에 저항하고 조선인의 자립성 자주성을 되살리는 몇 안 되는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선조들은 동식물에 우리말 이름을 붙이고 과학잡지를 발간하며 과학을 통한 ‘독립’에 앞장섰다.

우리 식물 이름 붙인 조선박물연구회

이덕봉, 정태현, 석주명(왼쪽부터).
이덕봉, 정태현, 석주명(왼쪽부터).
조선박물연구회는 1933년 결성된 박물학 연구단체로 이덕봉, 정태현, 석주명 등 조선인으로만 구성된 학회였다. 이에 앞서 1923년 설립된 조선박물학회는 일본인이 주축인 단체로 회원 중 조선인은 10분의 1에 불과했다 동식물에 이름을 붙이는 작업이 중요한 박물학 분야 전문가에 우리 학자가 없다는 것은 큰 문제였다. 우리 땅의 생물에 우리 이름을 붙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박물연구회는 동식물에 우리말 이름을 붙이고 그 중 식물에 관한 연구 성과를 모아 1937년 ‘조선식물향명집(朝鮮植物鄕名集)’을 발간했다. 조선식물향명집은 당시 한반도에 서식하던 식물 1944종의 이름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식물도감으로, 조선박물연구회 소속인 정태현, 도봉섭, 이덕봉, 이휘재가 공동 저술했다. 이 책에는 식물종의 표준 이름과 함께 형태적 특징, 학명과 그 의미, 유래 등이 담겨 있다.

조선식물향명집은 한반도에서 널리 쓰이는 향명(지역에서 부르는 이름)을 기준으로 표준명을 정했다. 여러 향명이 존재할 때에는 식물이 주로 자라는 지역을 기준으로 표준명을 정했다. 일률적으로 서울말만 고집하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큰쥐방울’ ‘등칡’ ‘통초’ 등으로 지역마다 달리 불리던 식물은 강원도에서 많이 자라기 때문에 강원도의 향명인 ‘등칡’을 표준으로 정했다.

이 책은 어려운 한자 이름나 일본 이름만 갖고 있던 식물에게도 우리말 이름을 붙였다. 일본식 한자 이름인 ‘야인과(野人瓜)’ 대신 제주 방언인 ‘멀꿀’을, 중국식 한자 이름인 ‘전추라(剪秋羅)’ 대신 전설에서 유래한 ‘동자꽃’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석주명이 1939년 발간한 ‘조선산 접류 총목록’ 속 컬러 나비 사진. 이 책은 일제강점기 조선 과학자가 영문으로 집필한 유일한 책이다. 출처 국회도서관,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 동아일보
석주명이 1939년 발간한 ‘조선산 접류 총목록’ 속 컬러 나비 사진. 이 책은 일제강점기 조선 과학자가 영문으로 집필한 유일한 책이다. 출처 국회도서관,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 동아일보
식물만이 아니다. ‘ 박사’로 유명한 석주명도 조선박물연구회의 주축이었다. 한반도 서식 나비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같은 종이지만 크기가 다른 ‘변이’를 연구했다. 조선인 최초로 영문 과학서를 내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곤충기를 발간한 조복성, 동아일보가 1931년 주최한 ‘조선곤충전람회’의 고문을 맡고 ‘백두산 곤충기’ 등을 지면에 연재했던 김병하도 있다. 특히 김병하는 곤충의 근면성과 단결력을 이야기하며 조선의 단결을 강조하는 등 박물학자로서 계몽에 앞장섰다.

이정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교수는 “조선식물향명집은 일제에 맞서 과학의 자주성을 되찾고자 했던 저항운동”이라며 “대만 등 다른 일본 식민지에서는 이런 독자적 학술 활동이 없었다”고 말했다.

잡지와 행사로 과학 보급화 앞장서

과학잡지
또 다른 조선인 단체 과학지식보급회는 조선의 과학 발전을 위해 과학 대중화를 실행에 옮겼던 단체다. 김용관의 주도로 1934년 설립된 과학지식보급회는 잡지 ‘과학조선’을 발간하고 ‘과학데이’ 행사를 진행하는 등 과학을 보급하고 대중을 계몽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과학조선은 과학지식보급회의 전신인 발명학회가 1933년 창간한 잡지로, 일반적인 과학적 사실뿐만 아니라 명왕성의 발견 등 최신 과학 소식, 라디오 같은 신기술, 마이클 패러데이 등 당시 활동했던 과학자 등을 소개하는 국내 최초의 종합과학잡지였다. 총 몇 권 발간됐는지는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지만, 10년 넘게 잡지를 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학데이는 1934년 4월 19일 처음 개최된 국내 최초의 전국 단위 과학행사였다. 3일간 진행된 과학데이는 강연회와 함께 활동사진 상영회, 거리 행렬, 라디오 방송, 과학관·박물관·공장 견학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대중에게 과학의 중요성을 알렸다.

김근배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는 “10년 넘게 발간된 잡지는 당시 잡지계 전체에서도 매우 드문 일이었다”며 “과학조선, 과학데이 등 과학지식보급회의 활동은 조선의 과학 대중화를 크게 앞당겼다”며 설명했다.

신용수 기자 credi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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