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사능의 어머니’ 퀴리부인 노벨상 100년… 외손녀 랑주뱅졸리오 핵물리학 박사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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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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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원전사고는 사기업이 이윤추구 매몰된 탓”

《 20일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한 지 100일이 되는 날이다. 전 세계를 방사능 공포로 몰아넣은 후쿠시마 원전은 아직까지도 사태가 해결되지 않아 ‘현재진행형’이다. 동아일보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100일을 맞아 국내 언론 가운데 처음으로 ‘방사능의 어머니’인 마리 퀴리의 외손녀 엘렌 랑주뱅졸리오 박사를 9일 프랑스 파리 근교 앙토니에서 만났다. 올해는 마리 퀴리가 1911년 12월 10일 노벨화학상을 받은 지 100주년이 된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방사능을 발견한 마리 퀴리는 연구에 몰두하다 방사능에 피폭돼 1934년 67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하지만 생전의 마리 퀴리를 또렷이 기억하는 84세의 외손녀 랑주뱅졸리오 박사는 후쿠시마 원전사태에 안타까움을 표시하면서도 인류를 위해 방사능은 더 폭넓게 이용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파리대 교수로 활동하다가 은퇴한 저명한 핵물리학자다. 》
○ 할머니와의 추억

퀴리 부인의 외손녀인 엘렌 랑주뱅졸리오 박사가 기자에게 보여준 1930년 사진. 왼쪽이 그의 어머니 이렌 졸리오퀴리이고 가운데가 할머니 마리 퀴리다. 오른쪽 아래 소녀는 랑주뱅졸리오 박사.
퀴리 부인의 외손녀인 엘렌 랑주뱅졸리오 박사가 기자에게 보여준 1930년 사진. 왼쪽이 그의 어머니 이렌 졸리오퀴리이고 가운데가 할머니 마리 퀴리다. 오른쪽 아래 소녀는 랑주뱅졸리오 박사.
“멀리서 오셨네요. 반갑습니다.”

파리 시내에서 교외로 나가는 고속전철을 타고 남쪽으로 약 20분을 달려 앙토니의 ‘소(Sceaux) 공원’역에 내렸다. 역을 나서자 마당이 널찍널찍한 고급 주택이 죽 늘어서 있다. 한 10분쯤 걷다 보니 랑주뱅졸리오 박사의 이층집이 보였다. 벨을 누르고 들어서자 그가 반갑게 기자를 맞아줬다.

84세여서 거동이 불편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랑주뱅졸리오 박사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실내를 둘러보니 작은 박물관에라도 온 것 같다.

“1937년부터 살기 시작한 이 집은 부모님(마리 퀴리의 맏딸인 이렌과 사위인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이 직접 설계하셨죠. 가까이서 모시려고 인근에 할머니(마리 퀴리) 집도 같이 지었는데 완공을 보기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랑주뱅졸리오 박사에게 마리 퀴리는 위대한 과학자가 아니라 언제나 찾아가면 자신을 귀여워해주던 다정한 할머니로 기억된다. 그는 “부모님과 라듐연구소 근처 공원에 놀러갔을 때 할머니가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낸 기억이 난다”며 “식사를 할 때면 초콜릿과 사탕을 주시곤 했다”고 말했다.

랑주뱅졸리오 박사는 인터뷰 도중 잠깐만 기다리라며 일어서더니 책장에서 오래된 앨범을 꺼냈다. “할머니의 사진 대부분은 퀴리 박물관에 기증했지만 그래도 몇 장 남아 있습니다. 이 앨범은 어머니가 연도별로 사진을 정리해놓은 건데 여기 1930년에 찍은 사진들이 있네요.”

사진을 보니 마리 퀴리 모녀가 벤치에 앉아 있고 앞에 손녀가 혼자 놀고 있다. 사진 속에서 마리 퀴리는 딴 생각에 잠겨 있는 듯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 퀴리, 인류에 이바지하는 과학 추구


엘렌 랑주뱅졸리오 박사는 최근 퀴리 부인과 두 딸의 편지를 모아 ‘퀴리 부인과 딸들: 편지’란 제목의 책을 펴냈다. 이 책을 펼치며 할머니인 마리 퀴리와의 추억을 회상하고 있는 랑주뱅졸리오 박사. 파리=강석기 기자 sukki@donga.com
엘렌 랑주뱅졸리오 박사는 최근 퀴리 부인과 두 딸의 편지를 모아 ‘퀴리 부인과 딸들: 편지’란 제목의 책을 펴냈다. 이 책을 펼치며 할머니인 마리 퀴리와의 추억을 회상하고 있는 랑주뱅졸리오 박사. 파리=강석기 기자 sukki@donga.com
“할머니는 명성이나 돈에 초연했습니다. 그가 과학에 많은 시간과 정열을 바친 건 과학을 좋아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면서도 자신의 연구가 인류의 삶을 개선시키는 데 이바지한다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랑주뱅졸리오 박사는 외할머니인 마리 퀴리가 후세의 과학도들에게 미친 영향력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마리 퀴리의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X선’의 진단효과를 확신한 마리 퀴리는 전장을 누비며 이동식 X선 설비를 보급시켜 수많은 부상 장병의 목숨을 구했기 때문이다. 그 뒤 라듐의 방사선이 암 치료에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많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방사능(radioactivity)이란 말을 만든 분이 바로 마리 퀴리입니다. 오늘날 병원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수많은 곳에서 방사선이 이용되는 걸 아신다면 무척 기뻐하실 거예요.”

마리 퀴리는 방사선 치료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방사선학 교육과정을 개설해 방사선 기사 150여 명을 배출했다. 또 라듐에서 나오는 방사성 기체를 포집해 병원으로 보내 치료에 쓰도록 했다. 그러나 정작 마리 퀴리 본인은 35년 동안 라듐을 다루며 과도한 방사능에 노출돼 그 후유증인 악성빈혈로 숨을 거뒀다.

○ “후쿠시마 원전 사고 안타깝다”


랑주뱅졸리오 박사는 최근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방사능에 대해 사람들의 두려움과 혐오감이 너무 커진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매년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탄광 매몰사고만 생각해봐도 방사능의 위험은 터무니없이 과장돼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물론 원자력은 당연히 위험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원자력을 안전하게 운영할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어요. 후쿠시마 원전의 근본 문제는 사기업이 건설하다 보니 이윤추구에 매몰돼 안전조치를 소홀히 한 데 있죠.”

전력의 80%를 원자력에 의존하는 프랑스의 경우 공기업(EDF)이 원자력 발전소를 짓는 데다 안전성은 별도의 독립적인 기관에서 감독한다. 현재 프랑스 플라맹빌과 핀란드에 안전성을 한층 더 높인 ‘3세대 원자로’를 짓고 있다고 한다.

마리 퀴리가 쓰던 실험장치 3점(사분 전위계, 압전석영, 전리함)이 한국(대전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에서 여름 방학 중 전시된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랑주뱅졸리오 박사는 “그 장치들은 피에르 퀴리(마리 퀴리의 남편)와 물리학자인 그의 형 자크 퀴리가 직접 만든 것으로 퀴리 부부가 방사능 연구를 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책으로만 마리 퀴리를 접한 사람들이 그가 쓰던 기자재를 직접 보면 또 다른 느낌이 들 것”이라며 “많은 사람이 전시장을 찾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첫 여성 - 첫 2회 -첫 부부 수상에 딸 - 사위까지… ▼
퀴리 가문은 ‘노벨상 패밀리’


여성 과학자들의 롤 모델로 존경받는 퀴리 부인은 노벨상과 관련해 ‘첫 여성 수상자’ ‘최초 2회 수상자’ 등 다양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퀴리 부인의 가족도 과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퀴리 부인과 남편, 딸, 사위 등 4명이 노벨상을 받았다.

퀴리 부인의 첫 번째 노벨상은 1903년 남편인 피에르 퀴리, 프랑스의 물리학자 앙리 베크렐과 함께 방사능을 발견한 공로로 받은 물리학상이다. 퀴리 부인이 이 상을 받음으로써 ‘최초의 여성 수상자’라는 영예와 함께 부부가 노벨상을 받은 첫 사례로 기록됐다.

1911년 퀴리 부인은 두 번째 노벨상을 받았다. 그는 다양한 광물의 방사능을 측정하다가 우라늄보다 방사능이 훨씬 강력한 시료를 발견했다. 1898년 논문에서 그는 새로운 원소 두 가지가 있다고 추정하고 각각 ‘폴로늄’과 ‘라듐’이라고 명명했다. 그 뒤 라듐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퀴리 부인은 우라늄 찌꺼기 수 t에서 라듐염 0.1g을 추출했다. 1902년 퀴리 부인은 마침내 라듐의 원자량이 ‘225’라고 발표했는데 이 공로로 1911년 12월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이 상으로 퀴리 부인은 분야가 다른 과학 부문에서 수상한 유일한 과학자로 기록됐다.

퀴리 부인은 최초의 모녀 수상이라는 진기록도 갖고 있다. 1934년 1월 퀴리 부인의 첫째 딸과 사위인 졸리오퀴리 부부는 폴로늄에서 나오는 강력한 알파입자(헬륨의 원자핵)를 알루미늄에 충돌시켜 알루미늄을 방사성 인으로 바꾸는 데 성공해 이듬해 노벨 화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파리=강석기 동아사이언스 기자 sukk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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