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철에도 족보… ‘생철’이 왕

  • 입력 2008년 5월 16일 03시 03분


■ 원자재 품귀로 가격 껑충… 서열별 재활용의 법칙

철판-철근은 불순물 적어

‘순수 혈통’ 대접 귀하신 몸

폐차 차체는 구리 등 섞여

“전기로 고장 유발” 푸대접

요즘 고철이 귀한 몸이 됐다. 중동 건설 붐으로 세계적으로 고철 수요가 늘어 웃돈을 주고도 질 좋은 고철을 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고철은 건물의 뼈대가 되는 철근의 주원료다. 고철이 없으면 건물을 짓기 힘들다. 16일 삼성물산의 한 관계자는 “현재 건설회사 대부분이 두 달치 분량의 철근만 갖고 있어 부르는 가격에 철근을 구매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현대제철이 최근 철근 판매가격을 t당 86만1000원에서 95만1000원으로 10.4%나 인상한 것도 고철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고철이 부족하다고 해서 출처도 모르는 고철을 함부로 쓸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고철은 탄생 과정에 대한 이력, 즉 ‘족보’가 중요하다. 족보 좋은 고철은 가치가 높지만 족보도 없는 고철을 함부로 썼다가는 문제만 일으킨다.

○ 폐차가 품질 높은 고철이 아닌 이유

고철이 뭐 그리 대단하기에 구하기 어렵단 말일까. 폐차장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차량이 모두 고철 덩어리인 것 같은데 말이다.

하지만 자동차를 상자 형태로 압축한 고철(가공고철)은 족보에서 가장 낮은 서열에 속한다. 전자부품이나 차체에 입힌 도료에 구리, 알루미늄, 납, 아연 같은 비철금속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고철을 전기로에서 녹이면 전기로가 고장을 일으키기 쉽다.

또 휘발성이 강한 아연은 열을 가하면 기화해 미세한 먼지 상태로 떠다니며 전기로에 문제를 일으킨다. 구리는 철의 내구성을 떨어뜨린다. 그래서 자동차를 고철로 활용하려면 부품별로 분해해 철 성분만 어렵사리 골라내야 한다.

가장 좋은 족보를 가진 고철은 철판이나 철근 같은 제품을 만들고 난 뒤 용광로에 남은 고철(부셸링)이다. 다른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생철’이다. 공장에서 자동차의 차체를 찍어낸 뒤 남은 철판(P&S)도 부셸링 못지않게 깨끗한 철이다. 현대제철 관계자는 “종이를 오리고 남은 모양처럼 생긴 철판을 보면 바로 가격 협상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철판이나 건축폐기물로 이뤄진 고철(노폐고철)도 ‘족보 좋은’ 고철이다. 수명이 다한 배의 철판이나 건축폐기물에 들어 있는 H빔과 철근은 불순물이 적고 적당한 크기로 잘라낼 수 있다.

○ 지구 온난화도 가격 상승에 한몫

요즘 고철이 부족해진 것은 일본이 교토의정서에 따라 탄소배출량을 규제하기 시작한 것도 원인이다. 현대제철 관계자는 “그동안 주로 일본에서 고철을 수입했는데 탄소배출량 규제 때문에 일본 철강 산업에서 고철 수요가 늘었다”고 설명했다.

철광석을 녹여 철을 생산할 때는 먼저 철에 달라붙은 산소를 떼어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화석연료를 많이 써 탄소를 많이 뿜어내 지구 온난화를 가속시킨다. 질 좋은 고철을 쓰면 이런 과정 자체가 필요 없다.

고철 품귀 현상을 타개하려면 족보 좋은 고철을 늘려야 한다. 연세대 금속시스템공학과 민동준 교수는 “철강 제품을 만들 때부터 재활용에 방해가 되는 원소를 덜 섞어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철에 크롬을 섞으면 고급스러운 광택이 나지만 철을 크롬과 분리하려면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재활용이 불가능하다.

민 교수는 “유럽에서는 재활용이 어려운 철강 제품은 판매하지 못한다”며 “우리나라도 철강 제품에 금속 원소의 성분을 표시해 쉽게 재활용할 수 있는 법안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전동혁 동아사이언스 기자 jerm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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