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시대] 국경이 사라진다/ 국적대신 ID…지구촌 성큼

  • 입력 2000년 4월 9일 20시 21분


▲ 낮엔 서울 직장근무 밤엔 네덜란드로 '인터넷 유학'

미국으로 출장가는 일이 잦은 투자회사 간부 김형래씨(35). 하루종일 월가의 은행직원들과

면담을 갖고 나서 뉴욕 맨해턴의 호텔방으로 돌아오면 그는 으레 침대에 편히 앉아 컴퓨터

를 켠다. 인터넷에 접속하자 한국의 회사 간부들이 미팅 룸에 나와 있다. 바로 ‘원격 임원

회의’다. 김씨는 수만리 떨어져있지만 그날 그날의 업무상황을 회사에 바로 보고하고 논의

한다.

다음날 아침 맨해턴 거리를 걷고 있는 김씨의 호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 벨이 울린다. 한국

서 쓰던 전화기지만 출장을 오면서 로밍 서비스 신청을 해놓아 한국에서 걸려오는 전화도

자유롭게 받을 수 있다. 서울 집에 있는 6살짜리 딸 애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처럼 생생히

들려온다.

“아빠, 내일 돌아 오시는 거 맞죠. 인형 사오는 것 잊지 말구요.”

가게의 간판만 영어로 씌어 있지 않으면 마치 서울의 어느 거리인 듯 낯설지 않다. 미국에

올 때마다 김씨는 그런 생각이 든다.

정홍천 신세계백화점 서울연수원 과장(39)은 작년 7월부터 네덜란드 트웬티대 교육공학 석

사과정을 밟고 있다. 그러나 정과장이 네덜란드에 유학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낮에는 회사일

을 하고 저녁시간을 이용해 서울에서 네덜란드 대학의 공부를 하고 있다.

정과장의 ‘신출귀몰한’ 주경야독은 어떻게 가능할까. 비결은 트웬티대의 교수들과 주고받

는 E메일이다.

96년 7월부터 6개월간 네덜란드 현지에서 필수 6개 과목을 이수하고 귀국한 정과장은 나머

지 교과과정을 E메일로 해결하고 있다.

이제 남은 건 4개의 선택과목 시험과 논문. 선택과목은 담당 교수가 E메일로 교재를 지정한

뒤 몇 페이지까지 읽고 문제해결 리포트를 작성하라고 지시하면 기일까지 리포트를 이메일

로 보내면 된다. 논문같은 경우도 주제를 정하면 담당교수는 친절하게 참고문헌까지 알려준

다.

김씨나 정과장 같은 이들에게 국경이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인터넷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

드는 이들 네티즌들에게 나라와 나라를 가로막는 수만리 바다와 육지는 별다른 장애물이 못

된다. 이들의 손에는 비행기나 배를 타지 않고도, 여권이 없어도, 머나먼 나라의 지리를 잘

몰라도 세계를 구석구석 누빌 수 있는 ‘프리패스’가 쥐어져 있다.

문화에 ‘장르 가로 지르기’가 있는 것처럼 이제 ‘국경 가로지르기’가 벌어지고 있는 셈

이다.

어릴 때부터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인터넷 게임과 ‘넷 미팅’을 즐겼던 세대들에게 머리칼이

나 눈동자의 색깔을 따지는 건 이젠 부질없는 일이다. 파란눈의 잭이나 황색 피부의 이(李)

씨나 금발의 요한슨이나 미국 한국 독일이라는 국적은 인터넷 ID에 그 자리를 내주고 있다.

웹에디터 제작업체인 나모인터렉티브에서 유럽과 싱가포르의 해외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는

송윤석대리(28). 그가 해외에 나가서 바이어들과 명함을 주고 받을 때 가장 먼저 묻는 말은

과거처럼 “국적이 어디냐”가 아니다.

대신 그는 “AOL이나 ICQ 어드레스가 있으세요”라고 묻는다. AOL과 ICQ는 모두 인스턴

트 메신저 서비스. 이 프로그램에 동시에 접속하고 있으면 실시간으로 채팅을 즐길 수 있다.

E메일은 받은 사람이 열어볼 때까지 ‘시간차’가 있지만 이 메신저 서비스는 시간차를 없

앨 수 있다.

송대리는 최근엔 이탈리아에서 부동산 사업을 하고 있는 현지인 친구로부터 1주일에 두 번

정도 AOL을 통해 현지의 소프트웨어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나모의 이탈리아 파트너

인 그에게서 좋은 정보를 빨리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송대리는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미

국과 남아공 바이어들과도 이 메신저 서비스를 통해 협상을 벌이고 있다.

많은 미래학자들이 ‘국경없는 세상’을 예측하긴 했다. 그러나 이처럼 빨리,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날 줄은 상상할 수 없었다. 인터넷은 과거 미래학자들의 상상력의 지평을 넘

어서는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과거에는 한 국가 단위 내에서 돈과 상품 등이 흘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디지털로 바

뀌면서 생산 판매 금융에서 세계화가 전례없이 가속화되고 있다. 로컬(local)에 그치던 문화

코드는 급속도로 폭넓어지고 있다”(윤영민 한양대 정보사회학과 교수)

한편으론 인터넷이 세계시장 통합을 가속화하면서 지구촌을 하나의 ‘용광로’로 만들고 있

다.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국가간 독립성이 유지되고 있지만 물리적,경제적 측면에서는 장벽

이 급속히 허물어지면서 한덩어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가령 맥도널드 햄버거나 리바이스 청바지가 세계적 브랜드로 자리잡았던 ‘유행의 속도’는

이제 온라인의 폭발적 스피드를 타고 ‘광속’으로 변하고 있다. 유행은 하루만에라도 국경

을 넘어 세계적으로 전파된다. 수원시에 사는 한 주부가 미국 필라델피아의 판매업체로부터

인터넷 주문을 통해 물건을 구입하는 것은 이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게 됐다.

93년 ‘민주주의의 종말’이란 책을 펴낸 장 마리 게노 교수. 그는 이 책에서 미래 세계는

국민국가가 붕괴되고 ‘국경 없는 사회’가 전개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렇게 되면 지금의

국경은 훨씬 확장된 ‘제국’으로 재편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게노 교수가 이런 예측을

한 것은 무엇보다 동서 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준 충격이었다.

인터넷이 만들고 있는 지금의 ‘사이버 스페이스’. 거기에서는 베를린 장벽이 넘어지는 소

리보다 더 큰 굉음을 내며 국경선이 허물어지고 있다.

<이명재·김호성기자>mjlee@donga.com

▲ 스위스의 김혜란씨 "고국의 부모님께 24시간 안부 전해요"

스위스인 스테판 보울러와 국제결혼을 해 스위스에 살고 있는 김해란씨(29). 지난해 11월27

일 첫 딸 소라 보울러를 낳은 뒤 한국에 있는 친정 식구들에게 외손녀가 커가는 모습을 어

떻게 알릴까 고민하던 차에 소라의 홈페이지를 만들어주기로 했다. 인터넷을 헤매고 다니던

김씨는 한국에서 유아용 홈페이지를 무료로 제작해주는 ‘베이비드림’을 발견했고 지난달

소라에게 홈페이지(www.babydream.net/homeR/rachel)를 선물해주었다.

김씨는 홈페이지에 소라의 성장과정을 사진으로 올려 국내 친정 식구들에게 알리고 있다.

김씨는 “한국에 계신 친정 부모님들도 외손녀가 거리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홈페이

지의 사진을 보시고는 심정적으로는 바로 옆에 살고 있다고 말씀하셔서 기뻐요”라고 말했

다.

김씨는 육아일기로도 ‘시시콜콜한’ 소라의 안부까지 국내에 전하고 있다. 김씨가 쓴 육

아일기를 잠깐 들여다보자.

“오늘 날씨가 너무 따뜻해서 엄마와 아빠는 곡갱이와 삽을 들고 정원을 골랐다. 집 정원

에 외할머니께서 보내주신 깨랑 호박이랑 상치랑 부추랑 많이 많이 심어야지. 그럼 이번 여

름엔 신선한 한국 채소를 맘껏 너에게 먹일 수 있겠지. 아 기뻐라.”(3월25일)

“이걸 어째? 너무 꽉 끼는 옷을 입혔더니만…. 오늘에서야 네 목에 붉게 변한 상처를 발

견했단다. 미안하다, 소라야. 엄마가 애를 편하게 입힐 생각은 않고 외모에만 신경써서 네게

상처를 입혔구나.”(4월3일)

국내 친척도 바로 응답하고 있다. 김씨의 조카 김영현양은 방명록에 “스위스 고모 안녕하

세요. 애기 모습 너무 잘 봤습니다. 소라를 사랑해요”라고 적고 있다.

<김호성기자>ks10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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