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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3월 26일 19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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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솔M닷컴 경영기획팀의 김형걸차장(38)은이 10년전 미국 유학중에 산 ‘Life’s Little Instruction Book’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상황별로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짧은 문장으로 표현한 이 책 속에서 그날에 맞는 문구를 찾아내는 것으로 김차장은 일과를 시작한다.
‘벤처 때문에 배 아파 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오늘은 이 문구가 좋겠군.’ 김차장은 E메일에 이 문구를 영어와 한글로 친 뒤 ‘SEND’를 누른다. E메일은 268명에게 배달된다.
▼인맥은 재산▼
김차장이 매일 아침 ‘떼메일’을 보내는 이유. “사람들을 매일 만나기 위해서다.”
김차장이 일 때문에 빈번히 얼굴을 보며 식사를 하는 사람은 50여명. 나머지 210여명은 예전같으면 “아이구∼ 오랜만입니다”하고 호들갑을 떨며 전화받았을 사람들이지만 떼메일을 보낸 뒤부터 이런 인사는 사라졌다.
▼뜻하지 않은 도움 받기도▼
최근엔 싱가포르의 한 투자은행의 고위간부가 E메일을 보내왔다. “한국의 정보기술(IT)업계에 투자를 고려하고 있는데, 괜찮은 회사를 소개해주세요. 한솔M닷컴을 포함해서요.”
E메일링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있는 싱가포르의 한 기자가 은행측에 김차장을 소개했던 것.
PC를 적극 활용하기 전, 김차장은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야 했다. 이른아침 호텔로 해외바이어들을 찾아가 아침식사를 같이 했고, 밤이면 동창회 연구회 등 10여가지 모임에 참석했다. 시간이 나면 전화통에 매달렸다. 그렇게 50명 관리하기란 ‘바퀴벌레 몰고 부산가기’였다.
▼넓어지는 동심원▼
‘기업해체와 인터넷혁명’의 저자 필립 에번스와 토머스 워스터는 정보의 윤택성과 도달성에 대해 얘기한다. 정보를 나누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정보를 얻게될 가능성과 깊이가 떨어지고, 나누는 사람이 적을수록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과 깊이가 커진다는 것.
이런 반비례곡선이 성립하던 시절은 벌써 갔다.”는 김차장은 “매일 아침 E메일을 확인하는 사람들은 ‘김형걸’이란 이름을 떠올리고 있으며, 6개월만에 전화를 해도 반갑게 인사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무료 인터넷여행사 티붐닷컴(www.tboom.com)의 사이트매니저 조현연씨(30)의 경우 최근 하이텔 여행동호회에 참여하면서 ‘속을 터 놓을 수 있는 사람’이 전에 비해 훨씬 많아졌다.
회원이 7000명이 넘는 대규모 동호회의 특성상 그 안에서 소모임이 생기는데 자신이 만든 소모임인 ‘길은 여기에’를 통해 ‘측근’ 30여명이 더 생겼다고 흐뭇해 한다.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이들 30여명 외에 E메일로, 또는 전화로 수시로 안부를 묻는 동호회 회원은 300여명.
덕성여대 김미리혜교수(심리학)는 “정보기술이 인맥의 동심원을 넓혔다”고 했다.
▼게다가 깊어지기까지▼
사람이 사귈 수 있는 사람의 수는 그 사람의 능력에 따라 제한이 없지만 측근으로 둘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1명일 수도 있고 5명일 수도 있으나 이런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마당발일지라도 측근이 많을 수는 없다는 것.
그러나 정보기술은 측근 외의 ‘주변인’의 수를 급격하게 증가시켰다. 나를 중심으로 그은 동심원이 넓어지면서 동심원 안에서 내가 사귈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질 뿐 아니라 나눠지는 정보의 깊이가 상대적으로 깊어졌다고 김교수는 분석한다.
▼두꺼워지게 만들려면▼
래디슨서울프라자호텔의 세일즈매니저 최장규씨(31)는 정보의 깊이가 얕은 ‘동심원 바깥부분’까지 두께를 키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중 하나.
객실판촉을 담당하는 그는 스프레드시트를 이용해 이름 나이 직급 생일 자녀생일 등의 개인정보 항목을 마련하고 이 안에 업무상 만나는 거래처 사람 1000여명의 정보를 입력해 놓았다. 일일이 이름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큰 키에 서글서글한 목소리’ ‘시청앞 포장마차에서 대포한잔’식으로 특징을 기록해 놓고 있으며 150여명으로부터는 사진을 그림파일로 받아 컴퓨터에 저장해 두었다.
친밀도를 10점 만점으로 해서 친한 정도에 따라 6점 8점식으로 점수를 매기고 때때로 친한 사람의 특성을 분류해 보기도 하는데 한때는 점수가 높을수록 주량이 많다는 결과가 나와 당황했다고.
▼'아날로그적 만남'계속 유효▼
한국전산원의 이석재연구원(사회심리학)은 “정보기술 덕분에 시간 공간의 제약이 없어지면서 사람을 만나지 않는 사이버공간에서도 유대관계가 형성되고 더 나아가 사이버 공동체가 생기게 될 가능성이 열렸다”고 말한다.
이연구원은 그러나 “사이버공동체는 사이버공간이 있다는 전제하에만 존재하며 정전이 되는 순간 소멸된다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 억양 표정 버릇 성격 등 대면관계에서 상대방을 이해시키는 비언어적 요소가 사이버공간에서는 실현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원의 중심 주변에 몰려 있는 측근들이 소멸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린 왕자’속 여우가 말했듯이 길들이고 공들여야 한다는 ‘아날로그적 만남의 미학’은 그래서 디지털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나성엽기자>news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