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세대와 계층, 만세 부르며 한민족의 일원 공감”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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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
백년 만의 귀환 : 3·1운동의 기록
국사편찬위-본보 3·1운동 100주년 학술회의 발표와 토론 내용

“3·1운동 기록물 데이터베이스(DB)는 연구자들에게는 숙원이었습니다. 3·1운동을 완전히 새롭게 정리할 수 있게 됐습니다. 3·1운동사는 앞으로 새로 쓰여야 합니다.”

국사편찬위원회와 동아일보가 27일 공동으로 주최한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백년 만의 귀환: 3·1운동 시위의 기록’에서 ‘3·1운동 데이터베이스와 3·1운동의 주체’를 발표한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은 “이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3·1운동의 전체상을 구성할 수 있게 됐다”고 강조했다.

이날 1∼3부에 걸친 개별 발표에 이어 4부에서는 열띤 토론이 진행됐다.

“학생 15명은 깃발을 흔들며 조선 건국 만세라고 크게 외쳤고 의관을 갖춰 입은 어른들은 또한 대한독립 만세라고 크게 외쳤으며 떠꺼머리(蓬頭亂髮者·봉두난발자)들은 단지 만세를 외치며 크게 웃었다.”

이기훈 연세대 사학과 교수가 이날 발표문 ‘3·1운동의 미디어와 상징체계’에서 소개한 일제 판결문 내용이다. 이 증언을 한 노용주는 1000여 명의 군중이 참가한 1919년 3월 17일 함경남도 정평군 고산면 시위 현장에서 체포됐다. 학생, 어른, 교육받지 못한 젊은이 등 3·1운동에 참여한 다양한 세대와 계층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 교수는 “학생들이 건국해야 하는 조선은 아마도 공화국일 것이고, 어른들이 독립해야 한다고 한 ‘대한’은 제국일 수도, 민국일 수도 있다”며 “만세를 외치며 웃었던 많은 민중에게도 만세를 불러야 한다는 사실은 명확했고, 만세를 부르면서 그들은 같은 민족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날 토론에서는 시위 건수나 참여자 수의 지역별 차이가 쟁점이 됐다. 이번에 구축된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상에서는 호남 지역의 3·1운동 참여자가 비교적 적은 것처럼 보인다. 이는 3·1운동 시위를 집계했던 기존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원인에 대해 학계의 기존 통설은 호남의 항일 의병항쟁이 특히 치열했기에 일제 탄압도 극심해 피해가 컸고, 천도교·기독교 등 종교 조직이 다른 지방보다 취약했던 것이 영향을 줬다는 것. 그러나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호남의 3·1운동 참여율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토론자로 나선 조건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교수는 “최근 종합되고 있는 일제 관헌 자료 ‘범죄인명부’에는 3·1운동 시위로 체포되거나 재판에 회부되거나 실형을 받은 이들의 명단이 등장하는데 전남 지역 피해자의 비중이 결코 작지 않다”고 말했다. ‘조선총독부의 3·1운동 탄압책과 피해 현황’을 발표한 이양희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 역시 “호남 지역의 체포자 수는 다른 지역에 비해 결코 적지 않다”면서 “시위 양상에서 차이가 있었거나 일제 군경 보고에서 시위가 누락됐을 소지가 있다고 보고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군별로도 당시 220개 군 가운데 211개 군에서 일어나 9개 군에서는 시위가 집계되지 않은 것도 정밀 분석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류준범 국사편찬위 연구편찬정보화실장은 “자료의 정밀도를 높이는 것이 이번 DB의 목적”이라며 “향후에도 지속 보완할 것”이라고 말했다.

3·1운동 시위의 비폭력성도 쟁점이 됐다. 한국 학계는 대체로 구체적 실증 분석이 없는 상황에서 비폭력 시위가 중심이었다고 해석한 반면, 북한이나 그 영향을 받은 재일조선인 학계는 그와 달랐다. 근래에는 격렬한 저항이 벌어진 개별 시위의 폭력성 연구도 상당히 축적됐다.

이날 학술회의에서 윤해동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는 시위대의 폭력은 발포라는 진압 방식과 연관돼 있다고 봤다. 윤 교수는 “대부분 시위는 평화적으로 시작했으나 일제의 탄압 탓에 폭력적으로 바뀌었다”며 “일제 군경이 비폭력 시위에 총을 발포한 경우도 굉장히 많이 나타난다”고 강조했다. 3·1운동 시위를 공세적 폭력을 중점에 두고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해석이다.

토론자로 나선 허수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윤 교수의 발표를 “방대하고 구체적인 데이터베이스 자료를 분석해 3·1운동의 전체상에 다가감으로써 기존 연구를 일신하는 한 전범(典範)을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진압 양상과 폭력 시위의 연동 정도를 해석하는 데는 입장을 달리했다.

향후 연구과제도 제기됐다. 허 교수는 “데이터를 분석해 지역별 추세 등 요점을 드러내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신문 자료 등을 추가해 데이터베이스를 계속 확대·보완하는 게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3·1운동연구소의 설립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정은 원장은 “의주 시위는 30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였고, 민족 대표가 직접 주도했는데도 관련 논문이 지난해에서야 처음 나왔다”며 “연구 과제가 많다”고 강조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3·1운동#3·1운동 기록물 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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