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전승훈]위기에 처한 솅겐조약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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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훈 파리 특파원
전승훈 파리 특파원
유럽에 살면서 가장 부러웠던 것은 차를 갖고 국경을 넘는 일이었다. 한국인에게 국경이라고 하면 철조망, 지뢰, 감시병, 검문소 등의 무시무시한 단어부터 떠오른다. 그런데 트렁크에 캠핑 장비를 가득 싣고 속도도 줄이지 않은 채 국경을 무사히 통과하는 기분은 짜릿하기 그지없다.

휴가 때 룩셈부르크에 놀러갔을 때다. 모젤 강가에 위치한 좋은 화이트와인 산지를 찾아가는 길에 우연히 ‘솅겐(Schengen) 5km’라는 안내판이 눈에 띄었다. 강가 언덕에 포도밭이 그림처럼 펼쳐진 솅겐은 한국으로 치면 읍면 소재지 정도의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4억 유럽인들의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하는 ‘솅겐조약’이 파리도, 로마도, 베를린도 아닌 이런 작은 시골마을에서 맺어졌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마 룩셈부르크에서 다리를 건너면 독일이고,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프랑스인, 3국 접경의 상징적인 지점이기 때문일 듯했다.

강가에 세워진 ‘솅겐조약’ 기념관에는 1985년 모젤 강 위 유람선 ‘프린세스 마리아스트리드호’ 선상에서 유럽 5개국 대표가 자유통행 조약에 사인하는 사진이 전시돼 있다. 이후 솅겐조약은 26개국으로 확대돼 유로화와 더불어 유럽연합(EU)을 지탱하는 두 기둥으로 자리 잡았다. 유럽에서는 노르웨이 북극해변의 ‘노스케이프’에서 스페인 지중해변의 타리파까지 5671km를 여권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고 달릴 수 있다. 솅겐조약으로 유럽은 경제적 단일시장으로 성장했다. 무엇보다 1, 2차 세계대전을 겪었던 유럽에 솅겐조약은 정치적 평화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요즘 유럽에서는 30년 만에 솅겐조약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파리 테러 이후 이슬람 극단주의자 테러리스트들이 난민 사이에 섞여 들어올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유럽은 다시 장벽을 세우고 있다. 스웨덴과 덴마크를 비롯해 6개 나라가 국경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2017년 ‘EU 탈퇴 국민투표’를 앞둔 영국에서는 그야말로 ‘떠날 것이냐, 말 것이냐(To leave or not to leave)’가 화두다. 솅겐조약을 이대로 두면 수십 년 안에 유럽 대륙이 ‘유라비아(Eurabia·유럽과 아랍의 합성어)’가 될 것이라는 극우 정당들의 목소리도 높다.

그러나 ‘난민 유입을 제한한다’는 명목으로 솅겐조약을 폐기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유럽 각국이 국경을 닫는다면 ‘단일 시장’이라는 경쟁력 상실로 난민을 수용하는 비용보다 더 큰 경제적, 정치적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도 유럽의 정치인들은 ‘난민 공포’를 내세운 극우 정당의 인기에 놀라 표를 얻기 위해 감정적인 대응에 골몰하고 있다. 솅겐 지역이 아닌 영국에서도 이민자 문제는 심각하다. 아무리 국경을 통제하고 솅겐조약을 폐기한다고 해도 난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난민의 갑작스러운 증가는 유럽 외부의 문제이며 외교정책 실패의 결과이지 솅겐조약 때문이 아니다.

세계 최대 경제권인 동북아시아 한중일 간에도 국경 검문이 사라지고 자유로운 통행이 가능한 날이 올까. 두만강 하구에 북한의 나진선봉(나선), 중국의 훈춘, 러시아의 하산으로 연결되는 3국 접경지역이 있다. 통일이 되면 그곳에서 아시아판 ‘솅겐조약’을 맺으면 좋겠다. 새해부터 북한의 수소폭탄 실험으로 뒤숭숭하지만 나는 평화의 꿈을 꿔본다.

전승훈 파리 특파원 raphy@donga.com
#솅겐조약#국경#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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