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부형권]트럼프를 얕잡아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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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형권 뉴욕 특파원
부형권 뉴욕 특파원
2015년은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70)를 얕잡아본 사람들을 겸허하게 만든 해였다.

“트럼프가 지난해 6월 출마 선언을 했을 때 ‘강력한 정치적 한 방’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다. 그러나 그 한 방이 이렇게 오래갈 줄은 정말 몰랐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연설문을 썼던 월스트리트저널 칼럼니스트 페기 누넌을 비롯해 많은 정치평론가들의 반성이다. 트럼프의 독설과 직설을 통해 표출되는 민심과 정치의 거대한 지각 변동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트럼프의 인기는 처음엔 이변이었다. 그러나 공화당 내 지지율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트럼프 현상’이 됐고 급기야 ‘트럼프주의(Trumpism)’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를 비판의 먹잇감으로 삼았던 미 언론이 앞다퉈 진지한 분석을 내놓는 상황이다. 그의 경선 캠프가 차려져 있는 뉴욕에서 보고 들으며 기자도 트럼프주의를 해석하는 키워드를 갖게 됐다.

우선 ‘돈’이다. 트럼프는 출마를 선언하면서 “나는 엄청난 부자”라고 자랑했다. 부채를 뺀 순자산이 87억3745만 달러(약 10조3101억 원)다. “워싱턴 정치인들은 전부 로비스트와 정치자금 후원자들에게 조종당한다. 나는 다르다. 내 돈으로 정치한다.” 로비스트를 고용할 돈도, 힘도 없는 중산층과 서민에게 트럼프의 돈은 강한 호소력을 지닌다. 대표적 진보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조차 “트럼프는 다른 공화당 후보들처럼 거액 정치자금 기부자들에게 몸을 낮출 이유가 없다”고 했다.

둘째는 ‘미디어’. 오랜 방송 경험이 있는 그는 신문과 방송뿐 아니라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의 생리도 꿰고 있다. “미디어는 나를 비판하기 좋아한다. 그래야 시청자와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미디어의 공격을 받는 게 아무렇지도 않다. 미디어가 나를 이용한 방식대로, 내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나도 미디어를 이용할 뿐이다.”

자서전의 이 대목에 이르면 ‘미디어가 알면서도 꼼짝없이 트럼프에게 당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한때 그와 껄끄러운 관계였던 폭스뉴스의 새해맞이 특집방송 하이라이트도 트럼프 차지였다. 해가 바뀌는 순간 가족과 함께 등장해 “내 새해 다짐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라며 홍보했다.

‘액션’도 주목해야 할 키워드. 트럼프가 기성 워싱턴 정치를 싸잡아 비난할 때 반복적으로 쓰는 말이 ‘All Talk, No Action(말만 있고 행동이 없다)’이다. 그는 “워싱턴 정치인들은 ‘해가 뜰 겁니다. 달이 질 겁니다. 온갖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라고 말하는데 국민은 그런 감언이설(甘言利說)은 필요 없다. 실천을 원하고, 일자리를 원한다”고 강조한다.

미 언론은 “‘막말’이라고 공격받는 트럼프의 독설이나 직설이 대중에게 먹히는 건 실현 가능성을 떠나 구체적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심층 면접을 해본 트럼프 지지자들은 그의 막말을 기성 정치인은 입에 올리지도 못한 ‘진실’로 여기며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다”고 소개했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는 떠나가더라도 트럼프주의는 계속될 것 같다”고 진단했다.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트럼프를 결코 얕잡아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부형권 뉴욕 특파원 bookum90@donga.com
#트럼프#막말#공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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