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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4월 4일 18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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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 경제학부 남성일(南盛日) 교수는 최근 몇 년 동안 대입 수험생들을 대상으로 면접을 할 때마다 놀란다. 기업의 목적이 뭐냐는 질문을 던지면 대부분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말에는 ‘성장’과 ‘이익 창출’이라는 대답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학생들 생각이 완전히 바뀐 것 같습니다. 일부 학생들은 기업에 적대적인 생각을 가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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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장비용 특수베어링 제조업체인 삼익LMS 심갑보(沈甲輔) 부회장은 이달 1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마련한 ‘전국 자치단체 경제 담당 공무원 대상 특강’을 했다. 심 부회장이 ‘행정 규제가 기업 활동을 어렵게 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강의를 하자 교육을 받던 한 공무원이 “부도덕한 기업을 어떻게 믿고 규제를 풀 수 있느냐”고 쏘아붙였다. 심 부회장은 “공무원까지 기업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것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우리 사회에 ‘반(反)기업 정서’가 확산되고 있다. 특히 주요기업에 대한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 후 이런 경향이 더 두드러지고 있다고 기업인들은 걱정한다.
기업에도 문제는 있다. ‘정경 유착’을 정당화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맹목적 반기업 정서가 확산될 경우 심각한 부작용을 미친다. 가뜩이나 ‘기업하기 힘든 나라’에서 국부(國富)창출의 주역인 기업과 기업인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 국가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글로벌 무한경쟁의 시대에 기업을 적대시하는 풍토에서 제대로 발전이 이뤄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계 최고 수준인 반기업 정서=다국적 컨설팅회사인 액센추어(Accenture)가 2001년 세계 22개국 880개 기업 최고경영자(CEO)를 대상으로 실시한 세계 각국의 반기업 정서 조사결과에 따르면 한국 CEO의 70%가 ‘국민들 사이에 기업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있다’고 응답했다. 조사 대상 국가 22개국 CEO 중 가장 높은 수치였다.
대한상공회의소와 현대경제연구원이 지난해 12월 만 20세 이상 성인 1000여명을 대상으로 ‘기업 호감도’를 조사한 결과 100점 만점에 38.2로 낙제 수준이었다. 연령대별로는 30대가 34.8로 가장 낮았다. 이어 △40대 36.8 △20대 38.4 △50세 이상 43.8이었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문우식(文宇植) 교수는 “기업에 대한 막연한 적대의식이 20대보다 오히려 30, 40대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 같다”며 “특히 이 세대는 피해의식과 보상의식이 합쳐져 과도한 평등주의, 나아가 반기업 정서로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시장경제의 본질을 인식해야=재정경제부 성수용(成守鏞) 법인세제과장은 올해 법인세 세수(稅收)가 지난해보다 2조원가량 줄어든 23조6000억원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작년 경기침체 정도에 비하면 세수 감소폭은 당초 예상보다 더 작은 것.
성 과장은 “지난해 경기가 아무리 나빴더라도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들의 수출이 잘된 만큼 전체 법인세 세수에는 큰 ‘펑크’가 나지 않을 것”이라며 “대기업들이 나라 살림을 꾸리는 데는 ‘효자’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국세청이 지난해 거둔 법인세 17조2000억원(2002년 12월 말 결산 법인 기준) 가운데 41.8%인 7조2000억원을 납부 대상 기업 27만1000여개 가운데 0.01%인 36개 기업이 냈다.
서울시립대 세무대학원 임주영(林周瑩) 교수는 “기업이 이익을 많이 내 세금을 많이 내면 자연스럽게 소득분배가 이뤄진다”며 “반기업 정서로 기업활동이 위축되면 이런 메커니즘이 무너져 실업대란 등 부작용을 초래한다”고 분석했다.
한국조세연구원 현진권(玄鎭權) 연구위원도 “반기업 정서는 무한경쟁을 벌이고 있는 글로벌 경제 체제에서는 거꾸로 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대다수 전문가들은 청소년에 대한 경제 교육 강화와 기업들의 투명 경영이 급선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명지대 경제학과 조동근(趙東根) 교수는 “대학생 대부분이 중고교 시절 분배를 중시하는 경제교육을 받아서인지 대기업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자신은 대기업에 입사하고 싶은 이중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며 “중고교 교과과정에서 시장경제의 본질에 대해 명확히 교육만 시킨다면 대학생들의 반기업 정서는 상당히 해소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박성주(朴成柱) 원장은 “대기업들도 강력한 주인의식과 투명성을 함께 담보할 수 있는 새로운 기업지배구조를 모색한다면 상대적 박탈감을 가진 사람들의 반기업 정서를 상당히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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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취재팀
▼英-스웨덴 성공사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해외 선진국에서도 기업에 대한 반감은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 국가의 반(反)기업 정서는 고용, 환경문제 등 구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지배구조나 빈부격차 해소 등 근본적 가치관을 문제 삼는 한국과 차이가 있다. 또 기업에 대한 적대적 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적극 나서고 있다는 점도 다르다.
영국은 최근 10여년간 경제가 괄목할 수준으로 성장했지만 기업에 대한 반감이 매우 커진 나라 중 하나다. 노조가 붕괴되고 노동시장 유연화로 정리해고가 자유로워지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기업에 대한 감정이 크게 악화된 것.
하지만 반기업 정서를 극복하기 위해 정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은 기업이 아니라 정부였다. 기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기업의 경쟁력 훼손, 나아가 국가경쟁력의 저하로 이어진다는 우려 때문이다.
영국 정부는 1999년부터 청소년을 대상으로 기업가 정신을 고취하고 기업의 역할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기업가 정신 제고 캠페인(Enterprise Insight)’을 추진해오고 있다.
또 2002년에는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을 모아 ‘CEO 원탁회의’를 추진해 대기업들이 그 지역 연고의 중소기업들과 파트너십을 구축하도록 유도하는 등 기업친화적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두 프로그램 모두 재무부가 캠페인 홍보를 맡고 있으며 무역산업부가 예산 전액을 지원한다.
스웨덴은 오랜 사회주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평등을 강조하는 명분론보다 실리를 우선시하는 실용주의적 사회분위기가 정착했다.
1970년대 OECD 국가 중 1인당 국민소득 3위였던 스웨덴 경제가 90년대 17위까지 추락하면서 기업에 대한 반감이 친기업 정서로 돌아섰다.
전통적으로 강성이었던 스웨덴의 중앙집권적 노조가 성장을 위해 개혁 지지로 선회한 것도 이 무렵이다.
집권당인 사회민주당도 경제성장을 제1의 국가목표로 선정하고 민간기업의 활성화를 위해 청소년 대상의 자유시장경제 교육에 힘쓰는 한편 기업, 언론, 시민단체가 공동으로 신뢰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는 경영자의 급여상승에 대해 어떤 이유로, 얼마의 급여가 제공됐는지를 투명하게 밝히는 작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엄정한 과세-기업회계 투명성 제고해야"▼
반(反)기업 또는 반기업인 정서 극복은 한국의 재도약을 위해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과제다.
기업의 존립 목적은 1차적으로 이윤 창출이다. 이윤 없는 기업이 지속적으로 상품과 서비스를 시장에 공급하면서 국부(國富)를 쌓고 일자리를 만들 수 없다. 기업이 내는 세금은 나라 살림을 위한 재원으로 사용된다.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반기업 정서는 기업활동을 위축시킬 수밖에 없다. 기업이 배척받고 갈등이 심해지면 결국 사회적 비용이 늘어나고 국가경쟁력을 약화시킨다.
기업과 기업인이 이미 쌓아놓은 부(富)를 죄악시하거나 시장메커니즘을 통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분배해야 한다는 일부의 시각도 바뀌어야 한다. 물론 기업과 기업인은 벌어들인 소득에 대해 법이 정하는 세금을 제대로 내야 한다. 하지만 외국의 많은 예를 보더라도 기업과 기업인의 소득에 대해 엄정한 과세를 통해 분배 정의를 이루고 있지만 이미 쌓은 부에 대한 반감은 없다.
기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 많은 기업이 생겨나고 사라졌다. 외환위기 이후만 봐도 30대 기업 중 절반이 새로운 기업으로 채워졌다. 지금 한국경제를 이끌어가는 기업은 시장에서 살아남은 승자(勝者)이고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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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함께 상속세 증여세 법인세 등에 대한 세법(稅法), 기업의 회계투명성과 소액주주 보호를 위한 제도 등은 예외 없이 지켜져야 한다. 법과 제도가 원칙을 잃으면 기업과 기업인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각은 바뀔 수 없다. 기업과 기업인도 사회의 존경을 받을 수 있도록 스스로 윤리적 책임에 대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수희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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