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16>卷三. 覇王의 길

  • 입력 2004년 4월 2일 18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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覇上의 眞人⑥

패공 유방도 그때쯤은 장량의 뜻을 알아차렸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장량이 이르는 대로 명을 내렸다.

“모든 장수들은 각기 거느린 군사들과 한꺼번에 내달아 적을 무찌르라. 위수 남쪽의 진나라 병력은 모두 여기 모인 듯하니, 이 한 싸움으로 함양에 이르기까지 남은 길을 깨끗이 쓸어버리도록 하라!”

그리고는 자신도 말에 올라 칼을 뽑아들었다. 병법에 밝은 것도, 무예에 능한 것도 아니었지만 패공 유방에게는 싸움의 미묘한 기미를 날카롭게 뚫어볼 줄 아는 본능적인 감각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감각이 패공을 몰아대 두렵더라도 앞장서게 했다. 번쾌와 노관이 갑병(甲兵)들과 더불어 그런 패공을 겹겹이 둘러싸고 장량과 역이기, 육고 같이 문약한 막빈(幕賓)들도 저마다 병장기를 뽑아들었다.

이내 패공 유방이 이끄는 5만 대군은 거센 파도처럼 진나라 진채를 덮쳐갔다. 그러잖아도 한 차례의 난도질 같은 공격으로 토막 나 있던 진군은 그런 초나라 군사들의 엄청난 기세에 질려버렸다. 선두가 맞받아치는 시늉을 하는 것도 잠시, 먼저 장수들이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고, 그 뒤를 졸개들이 뒤따랐다. 그나마 달아날 틈을 얻지 못한 졸개들은 그대로 병장기를 내던지고 털썩털썩 땅바닥에 주저앉아 그저 목숨만을 빌 뿐이었다.

그때까지 패공 유방은 수많은 싸움터를 누비고, 적지 않은 진나라 군사의 항복을 받아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래 진나라 영토가 아니었던 관외(關外)에서였다. 관중으로 드는 무관에서의 싸움은 진나라 군사들에게 매운 맛을 실컷 보여주었고, 장량의 계책이 아니었으면 요관의 싸움도 결코 수월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거기다가 이번에는 적이 대군인 데다 수도인 함양을 목전에 둔 싸움이었다.

그 때문에 앞서의 어떤 싸움에서보다 마음을 다잡아먹고 앞장을 섰던 패공 유방은 진나라 군사들이 그토록 무력하게 주저앉는 것을 보고 허망한 느낌까지 들었다.

(이게 대진(大秦)의 제도(帝都) 함양 외곽을 지키던 마지막 방어선이란 말인가. 이들이 강성하던 육국(六國)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천하를 아우른 그 무서운 진병(秦兵)이란 말인가. 넉 줄로 어깨를 맞대고 늘어서 동과(銅戈)를 내지르면 철벽도 뚫고 나간다던 그 진나라의 보갑대(步甲隊)란 말인가.)

하지만 오래 감상에 빠져 있을 겨를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승세로 느긋해진 패공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은 피를 보고 눈이 뒤집힌 초나라 장졸들이 벌이는 무참한 살육이었다.

“억지로 진군에게 끌려온 백성들은 해치지 말게 하라! 진나라 병사라도 항복하면 죽이지 말고 달아나면 쫓지 말라 이르라!”

일방적인 도살같이 된 싸움터에서 한발 벗어난 패공이 뒤따르는 노관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때 유방을 에워싸듯 호위하고 있던 장수들과 함께 있던 장량이 다시 나서서 말렸다

글 이문열 그림 박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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