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은의 이야기가 있는 요리]과일의 변신

  • 입력 2003년 5월 15일 16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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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20개 구(區)로 나뉘는 파리에서는 골목마다 매일 아침 일일장이 선다. 각 구의 성격에 따라 일일장의 특징도 달라지는데 예를 들면 부촌인 16구의 장에는 최고급 푸아그라(거위간), 유기농 와인식초등이 주품목이고 아랍인이 많이 사는 11구는 세계 각국의 향신료들이 현란한 공기를 이룬다. ‘유기농 마켓’이라 불리는 6구의 대규모 장에서는 아침마다 파리 시내의 유명 요리사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필자가 살던 골목에서는 매주 화 목 토요일에 장이 섰다. 매일 장볼 일이 없는 독신에게도 일일장은 ‘아 오늘 장이 섰으니 벌써 목요일이구나’ ‘복숭아 냄새가 진동하는 걸 보니 여름 다 왔구나’ 따위의 생각을 하게 만드는 정겨운 친구였다. 과일이 많이 나는 프랑스에서는 이맘때부터 각종 과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데 작고 꼭지가 긴 유기농 딸기는 향기가 달고 막 선보이기 시작하는 체리는 핏빛으로 부풀어 터질 듯하다. 아직 단단해 보이는 무화과는 한 봉지 사서 집에 두면 이틀 뒤 꿀처럼 부드러워지며 6, 7월에만 잠깐 나오는 납작복숭아(납작하게 눌러놓은 듯한 모양의 복숭아)는 잘 씻어서 껍질째 먹으면 귓속에서 꽃 냄새가 나는 듯 황홀한 맛이다.

‘신선함’이 ‘고급’으로 여겨지는 프랑스 식문화의 특성상 이맘때면 파리시내의 고급 레스토랑 메뉴에는 과일을 이용한 요리가 주연급으로 등장한다. 지명도 높은 음식평론 가이드 미슐랭의 별점을 3개나 받은 최고급 레스토랑에서는 소테른 와인(최상급 디저트 와인의 일종)에 절여둔 유기농 백도가 살짝 구운 거위간과 함께 나오는가 하면 이탈리아 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낸 ‘아르마니 카페’에서는 농익은 멜론과 무화과에 질 좋은 발사믹 식초를 뿌려서 카르파초(아주 얇게 썬 날 햄으로 육회와 비슷)와 같이 준다. 무르익은 검정 올리브를 한 움큼 넣고 구워내는 빵이 점심시간에 맞추어 따끈하게 준비됨은 기본이다. 누군가가 그랬던가 “미식은 죄악”이라고…. 그렇다. 미식은 세치 혀의 쾌락에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리는 섹시한 죄악이다.

● 과일볶음 국수

당연한 얘기지만 과일이 풍부한 지역의 음식에는 과일이 적극 이용된다. 동남아 음식이 그렇고 열대과일의 향이 이국적인 하와이 음식이 그렇다. 캘리포니아의 퓨전요리들은 설탕 대신 과일을 이용한 건강 메뉴들이 선두에 있고 낙농이 발달한 프랑스의 요리에도 과일이 애용된다. 오늘의 요리인 과일볶음 누들은 ‘신루’라는 이름의 싱가포르 요리사에게 배운 것으로 그는 이 요리를 ‘개미비’라고 부른다. 당면보다도 가는 쌀국수를 쓰기 때문인데 가느다란 국수를 개미나 맞을 법한 가느다란 빗줄기에 비유한 모양이다. 슬쩍 삶아서 헹궈 둔 국수와 파인애플, 그레이프프루트(자몽)를 준비한다.

요리의 생명은 밸런스다. 단맛에는 약간의 쓴맛이 오히려 장식적이며 톡 쏘는 매운 맛이 딱 한 점만 찍힐 때에 지루함이 날아가는 한 접시의 요리가 된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얇게 썬 청양고추를 몇 개만 볶아 매운 기운이 팬 바닥에 감돌게 한다. 고추는 건져내고 바로 파인애플 양파, 그리고 고기를 볶는다. 여기에 국수를 넣고 간장으로 간을 한 후 따로 볶아둔 피망과 그레이프프루트를 넣어 완성하는데 더운 날에는 차게해 애피타이저로 먹기 좋다.

과일은 특히 고기요리에 이용하면 좋은데 새콤달콤한 맛이 고기의 느끼함을 덜하게 하고 풍부한 수분이 뻑뻑한 고기질을 부드럽게 해주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자두나 살구 등을 곶감처럼 말려 두었다가 돼지고기나 닭고기의 속에 채워 굽는 가정식이 자주 등장한다. 이 밖에도 갈비에 키위를 갈아 넣고 닭강정을 조릴 때 사과를, 또 오리고기에는 오렌지를 넣어보자. 전통적으로 찰떡궁합이라 짝 지우는 오렌지와 오리는 오리고기의 느끼한 단맛 뒤에 오렌지의 상큼함이 입맛을 정리해 주어 매력적이다.

● 과실주 담그기

이처럼 매력 많고 비타민 C가 풍부한 과일들을 술로 담가 별미로 즐겨도 좋다. 한창 제철인 딸기나 이제 제철이 시작되는 복숭아, 자두 등을 소독한 유리병에 담고 소주를 부어 밀봉한다. 이때 과일은 잘 익었으되 단단한 놈들로 골라야 쉬 물러 터지지 않는다. 수분이 많은 딸기의 경우 색이 탁해질 수 있으나 한 달쯤 우려낸 뒤 면보나 체에 한번 걸러주고 맑은 소주를 조금 더 부어주면 해결된다. 과실주는 새콤달콤한 맛과 풍부한 구연산으로 인해 입맛을 돋워주는 식전주로, 피로를 풀어주는 약주로 마시면 좋다. 특히 발그레한 빛이 예쁜 딸기주는 술을 즐기지 않는 여자친구나 단 것을 즐기는 노인들을 위해 준비하면 좋을 듯하다. 만드는 이의 숙련도와 과일 함량에 따라 술맛이 다양해지니 시판되는 과실주나 포도주 한 병을 사서 마시는 것과는 또 다른 운치가 있다.

80년대를 뒤흔들었던 영화 제목들을 패러디해 “‘훔친 사과’가 더 맛있고, ‘뽕’을 한입 가득 먹은 후에 무르익은 ‘산딸기’를 바라본다”고 농익은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제철이면 터질 듯 물이 오르고, 지나버리면 맛과 향이 퇴색되는 과일의 한시적 달콤함이 일순간의 쾌락에 쉽게 빗대어 진다. 이처럼 과일은, 아니 먹을거리는 우리의 생활 요소 요소와 닮아있고 또 생명성에 있어서는 그 흐름을 같이 한다. ‘쓴맛 단맛 다 본다’ ‘달콤한 사랑’같이 맛으로 인생을 말하는 수 많은 표현들이 생겨났듯이 한 그릇의 음식은 그 자체로써 삶의 축소판인 것이다.

요리도, 인생도 살아있으니 음미할 수 있는 것. 늘 제철이 아니더라도, 늘 맛있지는 않더라도 그 자체로 감사하다.

● 과일볶음 국수

쌀국수(가장 얇은 것) 400g, 파인애플 200g, 그레이프프루트(자몽) 100g, 쇠고기 100g(잡채거리), 양파 70g, 피망 50g, 청양고추 20g, 식용유 버터 15g,참기름 약간, 간장양념(간장 3큰술, 설탕 1큰술반, 식초 1큰술반, 후추)

○1 국수는 살짝 데쳐서 찬물에 헹궈둔다.

○2 팬에 식용유와 버터를 함께 달구고 얇게 저민 청양고추를 한번 볶은 다음 건져낸다.

○3 2에 한입 크기로 자른 파인애플, 양파를 넣고 볶다가 쇠고기를 넣고 소금, 후추를 살짝 뿌린 뒤 볶는다.

박재은

○4 3에 국수를 넣고 간장양념을 부어 잘 저어가며 볶는다.

○5 다른 팬에 식용유를 조금만 두르고 피망은 따로 볶아 둔다.

○6 4에 5의 피망과 한입 크기로 준비한 그레이프프루트를 넣고 불에서 내린다.

○7 6에 참기름을 몇 방울 둘러서 마무리한다.

파티플래너·요리연구가 박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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