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민의 영화속 IT세상]'욕망의 배설구' 인터넷 게시판

  • 입력 2002년 12월 1일 18시 08분


지금은 근엄한 변호사가 된 한 친구는 서울 신림동 산동네에서 자취하던 시절 술만 마시면 길가에 주차된 차 위에 올라가 악을 쓰는 버릇이 있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모범적이던 그였다. 지금 돌아보면 그에게 술은 주변의 기대와 시선을 잊게 해주는 유일한 해법이었을지 모른다.

인터넷 게시판들은 익명성을 전제로 한 배설의 장이다. 술에 취해 악을 쓰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악다구니와 욕설도 심심찮다. 정치적으로 자신과 노선이 다르면 즉각 리플을 달아 욕을 해줘야 직성이 풀린다. 수많은 관계가 날줄과 씨줄로 촘촘히 얽혀 있는 인간사, 그 관계에 눌리고 치여 주눅이 들고 숨도 못 쉴 지경인데 익명성이 보장된다니! 내가 언제 큰 소리로 남에게 욕설을 퍼부을 수 있었던가. 내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 참으로 떨쳐버리기 힘든 유혹이다. 억눌려 있던 본능은 익명성을 방패 삼아 꿈틀거린다.

이젠 추억으로만 남아 있지만 예비군 훈련이 비슷했다. 예비군 훈련은 샐러리맨이던 내겐 모처럼 일탈의 해방감을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하루를 공친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겐 대단히 죄송). 모자는 일부러 삐뚤게 쓰고 윗도리는 단추를 세 개쯤 풀어헤친다. 지시가 내려오면 최대한 뭉그적거린다. 똑같은 제복에 나를 구별해줄 단서가 전혀 없는 공간에서 나는 익명성을 철저히 즐길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영화 ‘라이터를 켜라’를 보니 그 시절이 떠오른다. 백수인 주인공 허봉구(김승우)가 300원짜리 라이터에 목숨을 거는 예비군으로 나온다. 영화 초반 한없이 느려터진 예비군의 전형이던 그는 중반 이후 달리는 기차를 무대로 특수부대 뺨치는 액션을 선보인다. 소심하고 무능해 보이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아, 대한민국 예비군 만세!

예비군을 비하하거나 인터넷 게시판 정화 운동을 벌이고 싶은 생각은 꿈에도 없다.

그러나 일탈은 어쩌다 한 번이어야 맛이다. 궤도를 벗어나는 일이 습관이 되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게 오히려 일탈이 되어버릴지 모를 일이니….IT칼럼니스트

redstone@kgsm.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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