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우칼럼]그들의 '러브 샷'

  • 입력 2002년 11월 18일 18시 28분


노무현(盧武鉉)씨와 정몽준(鄭夢準)씨가 한밤중에 서로 팔을 걸고 소주잔을 비웠다. 흔히 말하는 ‘러브 샷(love shot)’이다. ‘러브 샷’은 그러나 ‘원 샷(one shot)’과 함께 잘못 쓰이는 한국식 영어의 대표적 예다. ‘원 샷’의 우리 식 해석은 술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들이켜라는 것이지만 영어의 뜻은 ‘주사 한 방’이다. ‘러브 샷’ 또한 사랑이나 우정을 확인하는 예식쯤으로 풀이되지만 실은 ‘총에 맞아 죽은 사랑’이나 ‘사랑의 주사약’이다(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안정효씨의 ‘가짜영어사전’에서).

▼'정치 원칙' 없이 '정치 셈법'만▼

하기야 지금 그런 걸 따질 때는 아닐 터이다. 관심사는 노-정 두 사람이 팔을 걸고 소주를 마셨다는 것이다. 대통령후보 단일화에 합의한 직후 포장마차에서 그들은 그렇게 ‘러브 샷’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러브 샷’이 달콤한 예식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단숨에 비워낸 소주의 뒷맛처럼 한 쪽은 일주일 내에 쓴맛을 봐야 하는 절박한 게임이다. 이기는 쪽이 후보가 되고 지는 쪽은 선거대책위원장을 맡기로 했다지만 어차피 ‘윈-윈 게임’이 되기는 어렵다. 권력의 세계에서 둘 다 이기는 법이란 좀처럼 없으니까.

정치사적으로 둘 다 이길 수 있는 게임이 있기는 있었다. 1987년 DJ-YS 단일화가 이루어졌다면 두 김씨는 우리 정치사에 함께 승자로 기록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두 김씨에게 역사의 기록이란 한낱 종잇조각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밀리면 끝장이라는 권력논리 앞에서 그들은 함께 패자가 되는 길을 고집했다. 두 김씨는 그렇게 민주화를 향한 국민적 열망을 외면했다.

실패한 DJ-YS 단일화에 견주어 노-정 단일화 합의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다만 1987년의 단일화 실패와 2002년의 단일화 합의를 같은 잣대로 저울질하는 것은 무리다. 우선 두 시기의 정치적 환경이 다르고 김-김과 노-정이란 구성 요소가 다르다. 단일화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호응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 근본 이유는 노-정 단일화가 ‘정치 원칙’를 떠나 철저히 ‘정치 셈법’을 따른 데 있다. ‘1강 2중’의 구도에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한들 제 논에 물대기식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

노-정 단일화가 보다 넓게 공감을 얻으려면 ‘낡은 정치의 틀을 깨 정치혁명을 이룬다’는 구호만으로는 안 된다. 단일화의 승자가 누가 됐건 두 정파가 어떻게 힘을 모아 어떤 방향으로 나라를 이끌고 가겠다는 것인지 공동의 청사진을 먼저 내놓아야 한다. 현재의 순서는 토론 후 여론조사로 ‘대표선수’를 정해 놓고 조율한다는 것이나 정체성이나 이념적 측면에서 같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훨씬 많은 노-정 두 사람이 총론에서 각론까지 어느 만큼이나 접근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하물며 누구로 단일화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면 노-정 단일화의 불안정성을 높일 뿐이다.

단일화를 통해 정권을 잡더라도 ‘나눠먹기’는 안 한다는 말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사실상의 공동정권에서 권력 분점은 피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정체성이 다른 두 정파의 권력 분점에서 비롯되는 국정 혼선과 국가적 피해는 지난 ‘DJP 연대’에서 볼 만큼 보았고 겪을 만큼 겪었다. 따라서 이는 결코 ‘러브 샷’으로 넘어갈 수 없는 문제다.

▼진정한 '러브 샷'이 되려면▼

아무튼 노-정 단일화 합의로 한 달 뒤의 대통령선거는 5년 전 대선과 마찬가지로 접전의 양상을 띨 것으로 예상된다. 한나라당도 성급한 대세론은 접어야 할 듯싶다. 선거개혁에는 후보 따로, 당 따로이면서 ‘철새 정치인’을 받아들여 몸집을 불린다고 대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식상한 메뉴로 유권자에게 ‘탁월한 선택’을 권유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노-정 또한 단일화를 통한 ‘누구 풍(風) 되살리기’를 대선 카드로 활용하려는 유혹을 떨쳐내야 한다. 노-정 단일화가 고작 그런 수준이라면 노풍이든 정풍이든 이미 그랬듯이 얼마 못 가 잦아들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12월 19일에 국민 다수가 누구와 ‘러브 샷’을 나누느냐는 것이고 진정한 ‘러브 샷’이 되려면 게임의 공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만이 새로운 시대의 희망을 말할 수 있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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