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의 공교육과 사교육]<3>독일·영국

  • 입력 2002년 9월 16일 18시 36분


《독일 뮌스터시 게르투루덴가 5번지에 위치한 쉴러 김나지움의 5학년 역사시간. 교사 호만씨(54)가 교실 앞쪽에 커다란 세계지도를 활짝 펼쳤다. “제2차 세계대전 무렵 전체주의에 대해 토론해 봅시다.” 한국 초등학교 4학년 나이의 독일 학생들은 15분 동안 열띤 토론을 벌인 뒤 서로 발표하겠다며 손을 번쩍 들었다. 전체주의가 조직에 대한 소속감을 높일 수 있다는 긍정적 주장과 개인주의가 무시된다는 부정적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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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세계지도 펴놓고 토론 - 뮌스터=김선미기자

교사가 이번에는 슬라이드 화면을 보여줬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서로 악수하는 장면이었다.

“이데올로기로 대립하던 냉전의 시대는 끝났습니까?”(교사)

“새로운 차원의 협력관계가 생겨났습니다.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고려한 것입니다.”(학생)

독일의 학교수업은 철저히 토론 중심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공부는 학생 스스로의 몫일 수밖에 없다. 한국처럼 학원강사나 과외교사가 숙제를 도와줄 수도 없고, 참고서를 그대로 베낄 수도 없다.

독일 학생들의 공부는 기본적으로 학교에서 이뤄지고 선행학습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그렇지만 학교수업을 따라잡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한 ‘나흐힐페(Nachhilfe)’라는 보충학습은 있다.

우쉴라 보빙켈 교장(50)은 “나흐힐페는 공부를 잘 못하는 학생이 유급되지 않도록 방과후 수업이나 개인과외를 통해 이뤄진다”며 “그러나 나흐힐페도 독일에서는 바람직한 교육방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10학년인 앙크(16)는 라틴어 실력이 부족해 학교 교사와 의논한 끝에 대학생으로부터 주1회 보충학습을 받고 있다. 수업료는 한번에 13.5 유로(1만6000원). 나흐힐페를 받는 앙크를 가엾게 여기는 학생은 있어도 부러워하는 학생은 거의 없다.

김나지움은 대학 진학을 목표로 선택하는 인문계 학교이지만 학생들은 암기식 공부에 매달리지 않는다. 8학년 마리 루이스 마틴(14)은 방과 후 집 근처 문화회관에서 발레와 요가를 배운다. 10학년 마티즈 슈말호스트(16)는 트럼본 연주를 배운다.

학교 측은 학생들이 다양한 취미와 적성을 계발할 수 있도록 교내의 스포츠, 음악, 미술 동호회에 가입할 것을 적극 권장한다.

보빙켈 교장은 “한반에 3,4명 정도 성적이 우수한 학생에게 월반의 기회를 주지만 정작 학생들이 월반을 원하지 않는다”며 “학교 공부를 빨리 끝내기보다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다양한 경험을 쌓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 학교 11학년 학생 70명 중 10명이 교환학생으로 외국을 다녀왔다.

▼영국▼

재미있는 과학시간 - 허포드셔(영국)=김선미기자

영국 런던 근교의 허포드셔에 있는 공립학교인 릭먼스워스학교 7학년(한국의 초등 5학년) 과학시간. 과학교사인 폴 휠러씨(37)는 칠판에 ‘황산동(銅)의 증발’이란 학습 주제를 써놓고 강의를 시작했다.

정해진 교과서는 없었다. 학생들은 파일로 묶을 수 있도록 구멍이 3개씩 뚫려 있는 공책에 교사의 설명을 받아 적고 그림을 그렸다. 교사들은 그림을 통한 입체학습을 강조한다.

교사의 설명이 끝나자 학생들은 삼삼오오 실험용 삼발이와 램프 등을 이용해 실험을 시작했다. 파란색 액체를 계속 가열하자 어느새 흰색 결정체로 변했다. 이날 숙제는 학생들이 실험을 통해 얻은 결정체를 그림으로 묘사하고 설명을 적어오는 것이었다.

영국에서도 개인과외를 받는 학생들이 일부 있다. 8학년 윌리엄(13)은 개인교사로부터 럭비, 크리켓, 불어를 배운다. 7학년 하라(12)는 주1회 30분씩 가정방문 교사를 통해 구몬수학을 배운다. 그러나 학교수업을 미리 배우는 선행학습이나 족집게식 교육이 아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늘어나는 학교숙제는 주로 복습개념이며, 과목당 30분씩 하루 2시간 정도면 된다.

영국 교육기술부는 개인성적의 석차를 내지 않고 과목별로 상, 중, 하의 등급만 평가한 것을 평가서와 함께 학생에게 나눠준다. 교사들이 학생 평가에 정성을 기울이기 때문에 학부모들도 교사들을 신뢰할 수 있다고 한다.

릭먼스워스학교 9학년인 딸을 둔 수 예이츠씨(40)는 “학교의 교육방식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학교공부 이외의 개인과외를 시키지 않는다”며 “학기 말에 한번 정도 담임교사를 찾아가 상담을 한다”고 말했다.

교사들은 “학부모들이 교사들을 존중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대충 가르칠 수가 없다”며 “학습자료를 만드는 데 1년 이상 걸릴 정도로 학생 교육에 심혈을 기울인다”고 말했다.

영국 교원양성원(TTA)도 1998년 ‘변화의 시점에 선 교사’란 개혁안을 발표한 뒤 교사 개인별 진로기록부(98년), 1년 과정의 수습교사제(99년), 성과급제 도입(2000년)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교육개혁을 지원하고 있다.

뮌스터(독일)·허포드셔(영국)〓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양국의 교육개혁 움직임▼

독일과 영국이라고 해서 교육에 대한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독일의 의무교육은 대개 6세에서 시작해 9학년(15세) 또는 10학년(16세)까지다. ‘그룬트 슐레’로 불리는 초등교육은 4년제이며, 졸업후 인문계 중등과정인 ‘김나지움’과 실업계 학교인 ‘레알슐레’, 레알슐레보다 성적이 더 낮은 학생들이 가는 실업계 학교인 ‘하우프트 슐레’로 나뉘어 진학한다. 독일에서는 대학에 진학하려는 학생들만 김나지움에 간다.

그러나 최근 독일에서는 지역마다 다른 김나지움 졸업시험과 대입자격시험(Abitur)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지난해 말 15세 학생을 대상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실시한 학력평가에서 독일 학생들은 극심한 학력 격차를 보였다. 지난해 전국 각급 학교의 유급생 수도 28만명을 넘었다.

또 독일학교개발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대학 교수의 절반 이상이 현행 제도로 입학한 신입생의 수학능력이 부족하다는 데 동의하고 있으며, 김나지움 교사들도 학생간의 경쟁을 유도하는 교육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국의 초중등교육과정인 국정교과과정(Key Stage)은 1학년(6세)에서부터 11학년(16세)까지로 구성된다. 1∼6학년은 초등교육, 7∼11학년은 중등교육이다. 11학년 때 의무교육 이수시험(GCSE)을 치른다. 이후 2년간 대학진학시험인 ‘A레벨 테스트’를 준비하는 과정(Six Form)에 다닌다.

1989년부터 시작된 GCSE는 너무 서둘러 도입됐다는 이유로 영국 내에서 아직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A레벨 준비기간 2년 동안 학생들은 2∼3과목만 집중 공부하기 때문에 사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계속 늘고 있다.

특히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명문 공립학교인 런던 오러토리에 다니고 있는 두 아들을 사립 명문인 웨스트민스터 스쿨의 교사들에게 A레벨의 역사과목 등을 과외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7월 언론에 보도돼 블레어 총리가 주창했던 공교육 내실화가 무색해졌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中3 크림포브의 하루▼

김나지움 10학년인 카트린 크림포브가 방과후에 취미로 승마연습을 하고 있다. - 뮌스터=김선미기자

독일 뮌스터시의 쉴러 김나지움 10학년(중3)인 카트린 크림포브(16·여)는 매주 2차례 동네 근처의 전원에서 승마를 배운다. 피아노와 첼로 레슨도 받는다. 부모의 강요에 떼밀려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재미를 느끼기 때문에 배우고 싶은 욕구가 절로 생긴다고 한다.

카트린의 일과는 오전 6시반 기상과 함께 시작된다. 오전 7시반에는 자전거를 타고 등교해 오전 7시50분부터 오후 1시까지 수업을 한 뒤 오후 1시반이면 집에 온다. 오후 2시 집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3∼6시 승마 또는 악기 연주, 오후 6시반에 저녁식사를 한다. 1시간 정도 학교 숙제를 한 뒤 TV를 보거나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밤 10시반경 잠자리에 든다.

카트린의 어머니 제르트라우드(45)는 “딸이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자신의 재능을 잘 발휘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엄마의 할 일”이라며 “지적인 것은 학교에서, 예체능은 집에서 가르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가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는 데 경쟁을 강조하는 미국식 교육시스템이 부럽기도 하다”며 “그러나 아이가 공부에 치여 편협한 인간관계를 갖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강조했다.

교사인 아버지와 사회복지 봉사활동을 하는 어머니, 오빠, 여동생, 남동생으로 이뤄진 카트린의 가정은 보편적인 중산층. 아버지 크리스토프(47)도 “선행학습은 돈이 많이 드는 데다 효과도 검증되지 않아 생각해 본 적이 없고 딸의 학교 숙제도 도와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신 카트린의 부모는 한달에 20만원 정도인 승마 레슨비는 아까워하지 않는다. 스포츠에 타고난 재능이 있는 카트린은 골프, 테니스, 춤도 배웠다.

카트린은 “공부를 아주 못하는 극소수의 학생들이 보충공부를 하기도 하지만 학교 공부를 미리 앞질러 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카트린은 “내년에는 교환학생 자격으로 1년 동안 호주에서 공부할 계획”이라며 “장래 희망이 교사인데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 벌써 흥분된다”고 말했다.

뮌스터〓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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